강 론 말 씀

2024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dariaofs 2024. 1. 13. 01:05

사진설명: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주목하는 젊은 트랜드 중 하나가 ‘육각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어떤 대상의 여러 가지 특성을 비교 분석할 때 사용하는 육각형 이미지를 ‘헥사곤 그래프’라고 합니다.

 

모든 기준 축이 끝까지 꽉 차 완벽한 모습을 보이면 정육각형이 되기 때문에 육각형은 완벽이라는 의미로 종종 쓰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성격, 특기 등 모든 측면에서 흠이 없는 ‘육각형 인간’을 선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가능할까요? 올해의 트랜드라고는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그 완벽한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의 나약함과 부족함, 불완전한 모습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한 후배에게 신학생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형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싫어.”

 

가까이 하고 싶은데, 너무 완벽하게 보여서 가까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약간 나사 빠져 보이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 부족함을 보고서 “나도 괜찮구나.”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벽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길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 빠져 보이는 것 역시 괜찮습니다. 함께 살면서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모습만을 보이려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겸손의 자세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지요.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 역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면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기에 매국노였고 그래서 부도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거지들도 이들의 돈은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우월감에 가득 찬 바리사이들이 이들을 멸시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멸시의 범주 안에 예수님까지도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나는 옳고, 나와 같지 않으면 틀렸다’라는 교만을 예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면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주님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교만한 사람은 주님까지도 내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관심이란 곧, 나 아닌 타인에게 마음 한자리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내 시간을 내어 주고, 내 삶을 조금 나눠주는 일입니다(송정림).

 

조명연 마태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