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통치와 세상의 지배 체제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대조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표현된다. 특히 하느님의 나라가 요구하는 것을 예증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선택하신 것은 놀랍게도 독창적이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를 하신다(마르 9,30-31).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를 하신다(마르 9,30-31).
그런데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하여 논쟁을 한다(마르 9,32-34). 여기에서 제자들은 부와 정치적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껴안으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껴안으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부와 권력에 대한 대안으로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제시하신다.
그 후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청했는데 제자들이 이를 꾸짖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셨다.
사실 어린이는 아무런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어린이는 사회 안에서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에서 어린이는 여성과 함께 약자 중의 약자로서 가장 밑바닥 계층에 속했다. 어린이는 가장 비참하게 짓밟히고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때 묻지 않은 순진함과 천진무구의 태도만을 가리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청했는데 제자들이 이를 꾸짖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셨다.
사실 어린이는 아무런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어린이는 사회 안에서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에서 어린이는 여성과 함께 약자 중의 약자로서 가장 밑바닥 계층에 속했다. 어린이는 가장 비참하게 짓밟히고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때 묻지 않은 순진함과 천진무구의 태도만을 가리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 위에 자리하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4)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어린이처럼 비천한 이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과 관련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4)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어린이처럼 비천한 이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과 관련되는 태도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회적 위계질서(hierarchy)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 계층 구조에 대한 변혁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뒤엎으신다. 이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마르 10,31) 경우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뒤엎으신다. 이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마르 10,31) 경우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위와 아래, 아래와 위가 뒤바뀌는 거꾸로(topsy-turvy)의 질서를 의미한다. 비천한 이가 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티나에서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은 가난과 권력 없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티나에서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은 가난과 권력 없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과 대조적인 사람들은 예루살렘, 티베리아스, 세포리스, 카이사리아 필리피 등에 사는 부유하고 권력 있는 지배자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이에 대한 관심은 구약성경에 그 뿌리를 둔다.
하느님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편 68,6)이시며 그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신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과부와 고아와 같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제시한다.
하느님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편 68,6)이시며 그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신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과부와 고아와 같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제시한다.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7) 계약의 공동체 안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의 복지(welfare), 즉 경제적 권리(economic rights)는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는 관대함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농업 사회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린이는 가장 낮은 사회적 계층에 속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농업 사회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린이는 가장 낮은 사회적 계층에 속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체 복음서의 의제(agenda)를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고, ‘계약의 공동체를 다시 새롭게 하기’(renewal of covenantal community)의 비전을 제시한다.
따라서 어린이들의 하느님 나라는 로마 제국의 질서에 대한 예수님의 대안(alternative)이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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