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1-15)
<빵의 기적>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은
예수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원(또는 권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관복음에서는
'빵의 기적'을
배고픈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일로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행하신 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기적이었지만 관점에 따라 다르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빵의 기적' 이야기에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게 여기셨다는 말이 없고,
외딴곳이라든지 시간이 늦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리고 '빵의 기적' 바로 앞에는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요한 5,46-47)"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고,
바로 뒤에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예수님의 신원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또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든 것은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고,
'빵의 기적'이라는 새로운 표징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요한복음에서의 '빵의 기적'은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관점이 다르다고 해도
똑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자비'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권능'은
따로 떨어져 있는(서로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군중을 가엾게 여기셨더라도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이 없다면,
또는 하느님과 같은 권능이 있더라도 군중을 가엾게 여기지 않으셨다면
'빵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신원이나 권능에 초점을 맞춰서 기록되었다고 해도
군중이 배가 고픈 상황이었음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적의 출발점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기적의 출발점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입니다.
'빵의 기적'에 대해서 강론할 때 '나눔'에 대해 말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늘 '실천'해야 할 일이고,
'빵의 기적'을 통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은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빵의 기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말은,
자기들도 병을 고치고 싶어서 몰려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세적인 필요 때문에 몰려들었다는 뜻입니다.
또 '빵의 기적'이라는 새로운 표징을 체험한 뒤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도 믿음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현세적인 필요를 채워 줄 지도자를 찾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숙제가 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 속에서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세속적인 지도자를 만날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메시아를 만날 것인가? 라는 숙제입니다.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 라는 숙제입니다.)
'예수 믿으면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라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데,
그들은 만일에 실제로 쌀을 주고 돈을 준다면 예수를 믿겠다고 할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런 이유로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군중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에게 날마다 하루 세 끼 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은 없습니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긴 합니다.
날마다 이슬만 먹고 살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또 사람의 인생에는
먹고사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 송영진 모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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