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 (연중 제23주일) 마태 18,15-20
주어진 시공간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분명히 나에게 주어진 시공간인데도 그 안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상합니다. 신체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공간 안에 채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있어야 하는 그곳에 저는 보이지 않고, 제가 수행했던 일들만 남아있습니다.
일의 기억과 흔적에 따라서 평가되는 나, 그곳에 기쁨과 아픔을 지니고 살았던 한 사람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할로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존재보다 역할을 더 중요시 하는 사회에서 존재는 역할의 수행 정도에 따라서 가치가 매겨집니다. 마치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처럼 되어 버립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을 잘 수행합니다. 사제직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본당 신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역할을 수행하면서 건조함을 느낍니다. 물기 없는 땅을 걷고 있는 것처럼 퍽퍽해집니다.
제가 수행하는 역할은 ‘나’를 위한 움직임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한 움직임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지 않았고 몰랐습니다.
대신에 이웃을 위한 희생이 제일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그 공부를 기술로 바꿔서 사용했습니다.
기술 덕분에 사람들이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면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건조합니다. 생쌀을 씹는 것처럼 거칠고 힘듭니다.
우리는 역할 놀이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놀이에 응답한 사람들이 서로를 치켜세우고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어주면 그것에 만족합니다.
역할과 역할의 만남, 분명히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움직이는 역동은 역할에 대한 역할의 응답뿐입니다. 존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역할을 걷어낸 상태의 내가 그를 만나지 못합니다.
존재가 살아있는 만남은 ‘있음에 대한 감탄’과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을 공유합니다. 그가 있음에 대해서 반응하고 기뻐하면 존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역할은 존재를 드러내는 부분이지 전체가 아닙니다. 존재가 있음으로 역할이 작용합니다.
부재에 대한 아픔은 존재 전체를 흔드는 위기입니다. 그래서 부재의 아픔을 겪고 있는 그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과 함께 경험하신 아픔은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종께서는 당신 마음속 깊이 유가족들의 아픔을 기억하셨고 고통 받는 이들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종께서는 사람을 역할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만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종의 이런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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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시관을 쓴 예수. 후세페 데 리베라(1591-1652) | ||
용서하라고 합니다. 용서는 매우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용서와 감정이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용서한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구체적, 이성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의 시작을 의미하지 완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존재의 문제이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역할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용서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부재의 고통을 느끼는 존재들 앞에서 차 벽이 세워지고 단식하고 있는 유가족들 앞에서 자장면과 닭을 시켜 먹습니다.
용서는 과정입니다. 과정 없는 용서는 감추기 위한 속임수입니다.
예수께서는 용서를 위한 과정을 가르치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용서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용서는 이성적 선택으로써 ‘드러냄’을 전제로 합니다. 거짓과 어둠을 진실과 빛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용서는 가능합니다. ‘잊자’는 말은 거짓과 어둠의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것이 ‘경제 살리기’입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경제가 죽은 적이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언제나 경제는 살아 있었습니다. 부자와 강자의 경제는 늘 살아 있었고 가난한 사람과 약자의 경제는 언제나 죽어 있었습니다.
저들이 살려야 한다는 경제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경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살아 있었던 경제, 부자와 강자의 경제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반응은 뜨겁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이 마치 나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거짓선전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너희들의 역할을 잘 수행하라고.... .
그리고 그 역할은 국민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들입니다. 그것도 강제된 의무, 박정희 독재 때부터 강제된 의무로서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거짓입니다.
용서는 존재를 존재로서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있음에 대한 환영과 감사, 그리고 부재로 인한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는 것부터 용서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 버린 한국사회의 현실이 답답합니다. 용서의 시작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있는 힘 있는 자들의 횡포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지금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의 일부에서 언급되고 있는 ‘용서’와 ‘잊자’ 혹은 ‘양보하라’는 말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용서와 사랑과 동일한 뜻인지.... .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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