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9,25-27)
<어머니의 고통>
우리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고 있고,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성모님의 마음은 하나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모님의 십자가는 하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성모님의 고통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아들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인지는
직접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온 인류를 위해서 겪으신 일입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고통은?
단순히 아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고통이기만 할까?
만일에 성모님이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분이었다면,
또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었다면,
또 '자기 아들만' 걱정하는 평범한 어머니였다면,
그랬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말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축일을 지낼 이유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어머니와 제자를 향해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요한 19,26-27)
성모님은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셔서
성모님이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아들의 고통을 함께 겪으신 일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의 어머니로서
인류를 위해서 수난을 당하신 메시아의 고통을
함께 겪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고통도 예수님처럼 온 인류를 위해서 겪으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모님의 십자가를
함께 묵상하면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성모님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일이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1)'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성모님께서 혼인 잔치의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걱정하신 것은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닙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 그것은 신랑에게는 몹시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걱정하신 것은 바로 신랑의 딱한 처지였습니다.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간에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당신의 일처럼 걱정하시는 것,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모두 수행하셨고, 그래서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9,30).
그러나 우리 쪽에서 보면 십자가의 은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은
각 개인의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동시에 성모님의 십자가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성모님께서 여기저기 발현하실 때마다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은
아직도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 때문에 겪어야 하는
당신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또는 남의 집 자식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자식만 안전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현실에서 자주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흔히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을 하는데,
신앙인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무관심과 이기심은 예수님의 적(사탄)입니다.
사랑의 반대쪽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반대쪽에 있는 것과 같고,
따라서 예수님의 적(사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곳저곳에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이고,
성모님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오해해서 반대하거나 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 실천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오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그것을 막는 것은 예수님의 적이 되는 일입니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서 혼자 울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 남이야 울든 말든 혼자서만 행복을 누리면서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만 행복한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외면한 혼자만의 행복은 사실은 행복이 아닙니다.
사탄의 쾌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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