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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 살티니 신부 (이탈리아, 1900-1981) |
1962년 1월 6일, 이탈리아 한 시골 성당에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새 신부가 올리는 첫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였다. 신자들과 신부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미사를 봉헌한 제노 살티니 신부, 그런데 그는 삼십여 년 전에도 첫 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이 두 번씩 첫 미사를 봉헌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노 살티니는 1900년 이탈리아의 카르피에서 대지주 집안 열두 형제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노는 열네 살 때 학교를 떠나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부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다고 한다. 1차 대전에 징집되었던 제노는 제대 후 밀라노 가톨릭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소외계층을 돕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신학과 철학도 공부한 제노는 193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보좌신부 시절에는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어린 사도들>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했다.
그 후 불의를 참지 못하던 제노신부는 파시즘 정권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가 구속되는 일까지 겪었다.
1947년 전쟁은 끝났지만 많은 아이들이 거리를 떠돌았다. 제노 신부는 그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옛 포로수용소 자리에 둥지를 마련했다.
공동체의 규약도 만들었다. 형제애를 뜻하는 ‘아델피아’와, 모임이나 제도, 질서를 뜻하는 ‘노모스’를 합친 ‘노마델피아’ (Nomadelfia)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제노 신부는 ‘인간사회 운동’을 주창하였다. 사회교리에 입각해 정의와 평등을 요구했지만 교계는 이런 움직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용공 신부’라는 의혹을 산 제노 신부는 끝내 교회 장상으로부터 공동체 일을 그만 두라는 명을 받았다.
때마침 마리아 지오바나라는 백작부인이 로마 북서쪽 150킬로 떨어진 그로세토 지방에 수 만평의 땅을 기증하였다.
제노 신부는 교회조직을 떠나 활동하기로 결심하고, 1953년 교황 비오 12세에게 환속 허락을 받았다. 10년간 그는 노마델피아를 키우는 일에만 전념했다.
1962년 겹경사가 있었다. 요한 23세 교황이 노마델피아 공동체를 본당으로 지정하고 제노 신부를 성직에 복귀시킨 것이다.
1980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제노 신부와 고아들을 직접 만나 격려해 주기도 했다. 노마델피아는 본당이면서 동시에 생활공동체다.
사유재산이 없고, 고아들과 일반 가정이 함께 생활한다. 따라서 어머니들의 특별한 소명이 요구된다.
모든 이가 함께 일하며 교사가 따로 없고 공동체의 모든 어른이 아이들의 교육에 전원 참여한다. 지금도 노마델피아 공동체에는 35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제노 신부는 1981년에 선종했다. 2009년 이탈리아 주교회의는 제노 신부의 시복청원에 들어갔다. 성직을 떠나는 아픔까지 겪었던 제노 신부가 실천적 신앙의 모범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권은정/ 인터뷰 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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