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의 페냐포르트 태생인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는 1222년에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바르셀로나(Barcelona)와 볼로냐(Bologna)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또 설교한 경험이 풍부하였다.
1230년 그는 로마(Roma)로 초빙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교황청의 회의와 칙서 등을 소장하는 업무를 맡았고, 이것의 결과로 '숨마 카수움'(Summa Casuum)이 발간되었다.
1236년 에스파냐로 돌아 온 성 라이문두스는 2년 동안 총장직을 역임한 뒤, 모슬렘과 유대인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 노력하였다. 이즈음에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를 격려하여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쓰게 하였으며, 아라비아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는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 1월 28일)와 함께 '메르체다리오회'의 설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00세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위한 생애를 살았던 성 라이문두스는 1275년 1월 6일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 바르셀로나의 카타리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878년에 바르셀로나의 주교좌 성당의 요한 바오로 소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교회법 학자의 수호성인인 그는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인의 축일은 1671년에 1월 23일로 로마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성인이 선종한 다음날인 1월 7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강론 : (마르 6,45-52)
<'주님'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온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입니다.
천지창조 이야기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기록이 아니라,
"하느님은 이 세상의 주님이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인간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주님'이 될 수 없고,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천지창조 이야기는
세상의 왕들이 사람들의 주인 행세를 한 것에 대한 반박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지배를 받는 하찮은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
(마르 6,45-52; 마태 14,22-33; 요한 6,16-21)"도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두려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 말씀은 우리가 박해자들 때문에 육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는다고 해도 영혼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일은 '영혼의 멸망'입니다.
영혼을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권력도, 자연 재해도, 그 어떤 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1) 복음 말씀의 내용을 보면, 제자들 곁에 예수님께서 안 계시는 상황이고,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서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만 남아 있는 교회의 상황,
또 세상 한가운데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의 상황,
또 박해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는
신앙인들의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셨다는 구절이 중요해집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마르 6,47-48ㄱ)"
저녁의 어둠 속에서 뭍에 계신 예수님께서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제자들을 보셨다는 것은
시력이 굉장히 좋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고,
바로 곁에서 보는 것과 똑같이 제자들을 지켜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에 안 계시는 것 같아도
사실은 제자들 곁에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이제는 우리 눈에 안 보여도,
예수님은 어디 먼 곳으로 떠나신 분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2) 그런데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마르 6,48)."
라는 구절이 좀 이상합니다.
여기서 '곁을 지나가다.'는 '앞에 나타나다.'로 해석합니다.
열왕기 상권 19장 11절을 보면,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지나가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는 말은
제자들에게 '주님으로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3)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떤 시련과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라."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인 나다.
그러니 나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라."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유령 같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람과 파도 때문에 힘든 상황인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나니까 더욱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처음에 부르심을 받을 때의 베드로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당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떠나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해도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예수님의 권능이
사실은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재림하실 때에
아주 많이 두려워하게 될 텐데,
그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를 처벌하시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믿고 두려움 없이 주님을 맞이하려면,
또 주님의 구원을 받으려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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