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1월 31일 나해 연중 제3주간 토요일(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dariaofs 2015. 1. 31. 00:30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왕국 피에몬테(Piemonte)의 베키(Becchi)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 프란치스코(Francisco Bosco)와 마르게리타(Margherita Occhiena)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두 살도 안 되었을 때 아버지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여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깊은 신앙과 근면한 노동 정신 그리고 순종의 덕을 배웠다.

가난 때문에 정규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성 요한 보스코는 9세 때 농한기를 이용하여 카프릴리오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만을 배웠다. 15세 되던 해인 1830년에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 읍내의 한 초등학교에서 단기 과정을 이수한 후, 키에리(Chieri) 시의 인문학교에 진학하여 5년 과정을 마치고 1835년에 키에리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41년 6월 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성 요한 보스코는 그의 은인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 6월 23일) 신부의 도움으로 토리노(Torino)에 있는 사제 연수원에서 신학 연구와 현대 사목에 관한 연구 기회를 얻게 되었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로 정치와 산업화의 중심지인 토리노에 체류하는 동안, 토리노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12-20세의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에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소년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844년 연수원을 졸업한 후 바롤라(Barola) 후작 부인이 경영하는 '소녀들 고아원'의 지도 신부로 부임하였으나 소년들의 사목에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독립한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100여 명이 넘는 소년들과 함께 거처도 없이 이동하다가 1846년 4월 토리노 시의 서북쪽 도라 리파리아 강변의 발독코(Valdocco)에 정착하였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한편으로는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견습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1851-1853년에는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성 요셉 카파소 신부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발독코에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다. 일반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기숙사의 소년들을 외부 학교에 보냈으며, 1856년에는 불어나는 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기숙사 구내에 학교를 세우는 등 그의 청소년 교육 사업은 점점 커져갔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여 대응하였고, 각자의 개성과 신앙을 격려하여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길러냈다. 이 사업이 날로 확대되자 그는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사랑을 설교하러 다니는 한편 유명한 “예방 교육법”이란 저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사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교황 비오 9세(Pius IX)의 권고에 따라 1859년 18명의 제자들에게 수도 서원을 하게 하였고, 그들은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서약하였다. 수도 서원으로 기초를 다진 성 프란치스코의 살레시오 수도회는 1869년 3월 1일 정식으로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으며, 1871년 4월 13일에는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하였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1888년 1월 31일 침대 주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회원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1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마르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어느 날 저녁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데

거센 돌풍이 불어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됩니다(마르 4,35-37).

침몰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합니다(마르 4,38).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즉시 바람이 멎고 호수가 고요해집니다(마르 4,39).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마르 4,40).

 

"왜 겁을 내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어서' 무서워한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무서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음과 용기는 비례하는 법입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는 말씀에서 '아직도'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이제는 믿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이 내용 앞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

마귀들을 쫓아내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 권능을 보았으니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깨우면서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무관심'을 비난한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권능을 안 믿고 있는 제자들이기 때문에

살려 달라고 예수님을 깨운 것은 아니고, 함께 걱정하자고 깨운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는 말씀은

"내가 항상 너희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아직도 안 믿고 있느냐?"

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인생살이가, 또는 신앙생활이

거친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각배를 타고 가는 것처럼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도움을 받기는커녕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살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그냥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기도해서 응답을 얻기도 하고, 기적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지만,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럴 때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답은 "'예수님과 함께' 라면, 죽어도 좋다."입니다.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죽을 때 죽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간다."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우리를 살려 주신다."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살려 주시는 분이라면,

종교 박해 따위는 없었을 것이고, 단 한명의 순교자도 없었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전부 다, 그대로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 같지는 않고,

살려 달라고 기도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만 하면 '무조건' 그대로 해 주셔야 하는 분이라면 '주님'이 아닙니다.

무조건 해야 한다는 말은 선택권과 결정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권한이 없다면 주님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님이신 것은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도 주님의 권한이고, 살리지 않는 것도 주님의 권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 내키는 대로 하시는 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께서 사도들을 구해 주신 일이 많은데,

나중에 사도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사도들을 살려 주시는 때는 언제이고, 순교하게 내버려 두시는 때는 언제인가?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도들을 살리셔야 할 때는 살리셨고,

데려가실 시간이 되었을 때에는 데려가셨습니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 진짜로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지상의 유한한 생명일 뿐이고,

참 생명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순교자들은 지상의 유한한 생명을 버려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은 분들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보면,

순교는 예수님께서 지상의 생명을 거두고 하느님 나라의 생명을 주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기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포기'는 정말로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살고 죽는 일의 결과를 알 수 없으니 우리는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단, 조건은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분도 아니고,

우리의 일에 무관심하신 분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 도와주지 못하시는 분도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셔야 할 이유가 있다면 살려 주실 것이고,

데려가실 시간이 되었다면 데려가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께서 옆에 함께 계시니

그냥 그대로 노를 저었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까

이까짓 파도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상황이 걱정되지 않았으니까 주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셔서 상황을 전혀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그런 생각이 바로 의심이고,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주무시면서도 제자들의 상황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