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5월 21일 나해 부활 제7주간 목요일(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dariaofs 2015. 5. 21. 00:30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Cristobal Magallanes Jara)로도 알려진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또는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하라)는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 중에 반란을 선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받고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한 순교자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869년 7월 30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토타티케(Totatiche)에서 농부였던 라파엘 마가야네스(Rafael Magallanes)와 클라라 하라(Clara Jara)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목동으로 일하던 그는 19살 때에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 있는 산 호세(San Jose)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30세에 과달라하라에 있는 산타 테레사(Santa Teresa)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같은 도시의 한 학교에서 교목신부로 봉직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토타티케의 본당신부로 임명된 후 학교와 목공예품 상점을 설립하고, 칸데라리아(Candelaria) 댐 건설을 돕는 등 고향의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멕시코 서부 시에라마드레 산맥(Sierra Madre Mts.)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후이촐족(Huichol)의 복음화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아스퀠탄(Azqueltan)에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에 선교 기관을 설립했다. 1914년 정부로부터 과달라하라의 신학교를 폐쇄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그는 자신의 본당에서 신학교를 열 것을 제의하였다.

 

1915년 7월 토타티케에 개교한 신학교는 빠르게 성장해 다음해 이미 17명의 학생이 등록했고, 학칙과 두 명의 교수를 파견해준 과달라하라 교구의 호세 프란치스코 오로스코 이 히메네스(Jose Francisco Orozco y Jimenez) 대주교로부터 승인도 받았다.

그는 무장반란에 반대하여 많은 저술과 설교를 했으나 오히려 그 지역의 크리스테로 반란을 도모했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체포되었다. 1927년 5월 21일 농장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된 그는 얼마 안 남은 소지품마저 사형 집행인에게 주었고 그들의 죄 또한 용서해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재판도 없이 4일 후인 5월 25일 할리스코의 콜로틀란(Colotlan)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칼로카 코르테스(Augustinus Caloca Cortes)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나는 결백하며, 나의 피로써 나의 멕시코 형제들이 일치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크리스테로 전쟁과 관련하여 희생된 24명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강론   :   (요한 17,20-26)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0-21)."

 

지금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또 믿는 이들이 아버지와 예수님 안에 있게 되기를,

또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바라시면서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십니다.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아버지와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을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야"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이들이 분열되어서 제각각 따로(개별적으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다면 당연히 형제와 일치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 상태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또 형제와 분열된 채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안에 있게 된다는 말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라는 기도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는 기도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세 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가지이고,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사랑'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신분증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은,

"너희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되고,

동시에 "너희가 믿고 있는 '나를' 증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는 뜻도 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사랑'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사랑입니다(요한 15,13).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놓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7,22).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는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가 된 일치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도 그렇게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또 '사랑'은 '섬김'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종합하면,

우리가 모두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려면, 그래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면,

서로 사랑, 양보, 희생, 겸손,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나는' 사랑, 양보, 희생, 겸손, 섬김을 실천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마음대로 행동한다. 왜 나만 손해를 보아야 하는가?"

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실제로 생길 때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의 입장에서 "너희는 모두" 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너는 나를 섬기지 않아도 나는 너를 섬긴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내가' 먼저 실천하면서 그가 변화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만일에 "나는 겸손하게 너를 섬기는데, 왜 너는 겸손하게 나를 섬기지 않는가?"

라고 비난한다면?

그런 말 자체가 자기가 겸손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 될 뿐입니다.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나는 이렇게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항상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가?" 라고 비난한다면?

그런 말 자체가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사랑을 실천할 뿐입니다.

 

사랑, 양보, 희생, 겸손, 섬김은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강요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남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