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6월 11일 나해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dariaofs 2015. 6. 11. 00:30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극찬을 받은 성 바르나바는 비록 그가 12사도에 들지는 않았으나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원래 키프로스(Cyprus) 태생으로 요셉(Josephus)이라 하였는데,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봉헌하였다. 이때 사도들이 그에게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초기 신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공동체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의 공동체를 설득하여 바오로(Paulus)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어 그곳의 공동체를 둘러보기도 하였다(사도 11,22 이하).

 

그리고 바오로를 타르수스(Tarsus)로부터 그곳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오로와 함께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공동체에 안티오키아의 기부금을 전달하였고,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Joannes Marcus)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세 사람이 키프로스와 베르게 그리고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선교여행 길에 올랐을 때, 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게 되자 이방인들에게 설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리가오니아의 이고니온과 리스트라로 갔으며, 여기서 그들은 신들로 인정받았으나 곧 돌 세례를 받게 되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다.

유대인 예식 준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그들의 활동 보고를 하였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오는 길에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다른 방문 길에 오르려 하였으나,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이유로 요한 마르코를 반대하자 그들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바오로와는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전승에 의하면 바르나바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Roma)에서 전교하였고, 키프로스 교회의 설립자로 인정받으며, 61년경에 살라미스에서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위경인 바르나바의 편지가 그에게 헌정되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70년과 100년 사이 알렉산드리아의 신자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나바의 복음서는 이탈리아의 어느 그리스도인이 기록한 듯하고, 바르나바의 행전은 요한 마르코의 업적일 것이다.

 

강론   :    (마태 10,7-13)

 

<복음 선포>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8)."

 

이 말씀을 한마디로 줄이면 "복음을 선포하여라."인데,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할 때 '말로만'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일도 함께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와 평화와 희망을 주는 것,

그 '사랑의 실천'도 복음 선포입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란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라는 명령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말로만' 복음을 선포하고,

'사랑'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준다면,

그것은 복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을

"교회란 어떤 곳인가?", 또는 "신앙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저' 받아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저' 받는 사람이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받을 때 이미 '거저' 받았기 때문에

복음 선포와 사랑 실천을 할 때에는 대가를 요구해도 안 되고,

어떤 조건을 붙여도 안 됩니다.

물질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안 되는 일입니다.

또 만일에 믿는다는 조건으로 사랑을 준다면,

또는 사랑을 주었으니 믿으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또는 믿기 전에는 사랑을 조금만 주고, 믿으면 더 많이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이고 무제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거저' 라는 말이 중요하지만,

"주어라." 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주는 곳'입니다.

(신앙인은 기본적으로 '주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교회는 거두는(받는) 곳이 아니라 베푸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이 말씀에서 '평화'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뜻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총과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는 참 평화를(은총과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길로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에서 '그 집'은 '모든 집'인데,

사도들을(복음을 전하는 신앙인들을) 받아들이는 집일 수도 있고,

거부하는 집일 수도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이라는 말은 어떤 자격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차별적으로 평화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예수님의 평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들은(신앙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평화를 빌고,

예수님의 평화는 모든 사람에게 내리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누릴 수 있습니다.

 

'마땅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사도들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과 평화를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평화를 대신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뜻입니다.

책임은 주는 것을 안 받겠다고 거부한 쪽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평화' 라고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의 평화' 라고 표현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도들은(신앙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평화를 받아서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평화'는 곧 '우리의 평화'입니다.

이 해석을 바탕으로 해서 풀이하면,

'너희의 평화'는 "내가 준 것을 받아서 이미 너희의 것이 된 그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사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이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부터 이미

예수님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되고,

그 평화는 이미 자신의 평화입니다.

 

'너희의 평화' 라는 말을,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안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평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고,

이미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복음 정신, 믿음, 희망, 사랑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