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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송 신부의 ‘우리시대 교황님들’] (4) 고뇌의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dariaofs 2015. 6. 28. 05:00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순교자

한국 김수환 추기경 임명하기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는 항상 ‘파격’이란 수식어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교구 사목국장 손희송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 역대 교황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교황주일을 맞아 역대 교황들의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한 손희송 신부의 강의록을 요약하여 전합니다.
본 내용은 지난 6월 19일 교구 성소국이 주최한 본당 성소후원회 임원연수의 일부입니다.
좋은 내용을 전해주신 손 신부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지난한 과정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끈기와 인내력으로 수행해 나간 바오로 6세


  



교황 바오로 6세(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는 1963년 6월에 교황 요한 23세가 선종하자 그의 후임자로 선출됩니다. 선교를 지향하여 ‘바오로’라는 이름을 선택합니다. 바오로 6세는 전임 교황 요한 23세가 개최하였지만, 첫 회기만 거치고 마무리 짓지 못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속해 나가겠다고 공표합니다. 제4차 회기까지 열린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됩니다.

공의회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바꾸면 안 된다. 그대로 둬야한다.’고 하는 주장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측 모두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에 서로의 의견을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은 매우 지난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황 바오로 6세는 묵묵히 이 일을 수행해 나갑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교구장 쾨니히 추기경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개혁 절차를 시작한 장본인은 아니었지만 그는 공의회를 이어 나가게 했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요한 23세처럼 단 한 번의 미소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매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에게는 특히 이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바오로 6세는 끈기와 인내력과 꾸준히 버텨 나가는 의지력이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과제에 봉착했을 때 뒤로 물러나 몸을 낮추는 깊은 겸손함에서 우러나오는 힘이 있었다. 교회 쇄신이라는 위대한 과업은 종종 흔들리고 멈칫대고 정체되고 가로막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바오로 6세가 꿋꿋이 밀고 나가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공의회 후속조치=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상용, 그리스도교 일치

6대주를 방문한 최초의 “순례자 교황”

최초로 유엔 방문, 전쟁종식과 군비축소 호소 연설해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를 꾸준히 추구해갑니다. 또한 세계 평화를 위해 군비축소, 전쟁 반대, 경제적 격차의 극복 등을 촉구합니다. 


아울러 교황직의 화려함과 허례허식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교황이 되어 밀라노 교구 신자들에게 선물 받았던 화려한 교황 삼중관을 공의회 개막식 때까지만 사용하고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교황직의 화려함과 허례허식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교황이 되어 밀라노 교구 신자들에게 선물 받았던 화려한 교황 삼중관을 공의회 개막식 때까지만 사용하고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5대륙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면서 그 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장시간 여행한 교황으로서, 그 덕분에 ‘순례자 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로써 바오로 6세는 교황직의 새로운 활로를 연 장본인으로서, 그의 후임자들도 이러한 길을 계승하였습니다.

1965년 8월에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미국과 유엔을 방문합니다. 당시 점차 확대되어 가던 베트남 전쟁을 염두에 두고 유엔에서 평화를 주제로 전쟁종식과 군비축소를 호소하는 연설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더 이상 전쟁은 안 됩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평화, 우리 인류의 운명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1970년에는 11월 27일 필리핀을 방문하였는데, 마닐라 국제공항에서는 한 괴한이 칼을 휘둘러 바오로 6세를 암살하려 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암살 기도는 다행히 미수로 끝났습니다.

 

비오 12세부터 시작된 추기경단 국제화 확대

한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을 임명

 


△ 바오로 6세는 비오 12세부터 시작된 추기경단의 국제화와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1969년에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임명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바오로 6세는 비오 12세부터 시작된 추기경단의 국제화와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가 선출되었을 때 추기경단은 약 80명이었으나 1973년에는 145명에 달했습니다. 추기경단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탈리아인이 소수가 되었고, 제3세계 출신이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1969년에 한국 최초로 임명된 한국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도 포함되었습니다. 1968년 이후에는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황직 수행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극렬 좌파 학생운동, 테러가 횡행하는 등 불안정한 국제정세는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1968년에 발표한 인공피임을 금지한 회칙「인간생명」에 대한 거센 찬반 논란, 전통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간의 투쟁, 성직자 결혼 허용에 대한 요구의 증대,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 추종자들의 전례 개혁에 대한 저항,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신자수의 저하와 성소를 포기하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증가 등이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1978년 3월 16일 바오로 6세의 평생 친구이자 이탈리아 기독교 민주당의 정치가인 알도 모로가 이탈리아 최대의 극좌 과격 테러조직인 붉은 여단에 납치됩니다. 여든 살 고령인 교황은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 석방을 요청합니다. 


교황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로는 5월 9일 피살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큰 슬픔에 빠진 교황은 라테라노 성당에서 모로의 장례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6일 교황 별장인 카스텔 간돌포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심장마비로 선종합니다.

 

불안한 국제정세 속의 교황

장례는 아무 장식 없는 나무관으로,

무덤은 땅바닥과 똑같은 높이로…

 
 



바오로 6세의 장례미사는 그의 유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무 장식도 없는 소박한 나무관이 베드로 광장 바닥에 놓였고, 관 위에 성경이 펼쳐 있었습니다.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있는 무덤은 땅바닥과 똑같은 높이로 조성되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2014년 10월 19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바오로 6세는 요한 23세처럼 대중 친화적이거나 유머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여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많이 망설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요한 23세는 그를 ‘약간 햄릿을 닮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빛과 영광은 교황 23세에게 돌리지만, 공의회 진행 과정과 그 이후의 모든 어려움과 혼란은 바오로 6세가 져야했습니다.

바오로 6세는 급격한 시대의 변화에서 분출하는 요구에 응하면서도 교회의 본 모습을 보존하려는 힘겨운 노력을 큰 인내로 묵묵하게 수행해나갔습니다. 그래서 쾨니히 추기경은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순교자였다.”고 말합니다.  

 

<5편 요한 바오로 1세에 계속>

글| 손희송 신부(교구 사목국장)
정리| 서동경 안나(홍보국 언론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