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7월 25일 나해 성 야고보 사도 축일

dariaofs 2015. 7. 25. 00:30

 

성 야고보(Jacobus)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형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였다. 그들은 부친과 함께 겐네사렛 호수에 배를 띄워 고기잡이로 살던 사람들이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그들은 예수와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Andreas)의 집에 갔을 때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께서 낫게 해주신 현장에도 있었다(마르 1,29-31). 그들은 또 자기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태 20,20-28) 하고 청했던 사람들이다.

 

또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둘 다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얻었고(마르 3,17), 예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54)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에는 베드로(Petrus)와 그들 형제만 따라오게 하셨으며(마르 5,37),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 순간에도 베드로와 그들 형제만 함께 자리하게 하셨고(마태 17,1-8), 게세마니(Gethsemane)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러하셨다(마태 26,36-46).

성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 12,1-2).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에스파냐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지방으로 옮겨져 모셔졌고, 후일 이곳에 대 야고보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마태 20,20-28)


<무엇을 원하느냐?>


제베대오의 두 아들, 즉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를 청합니다(마태 20,20-2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청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고(루카 22,24),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예수님께 물은 적도 있습니다(마태 18,1).

지금의 장면에서도 다른 사도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을 듣고

불쾌하게 여겼습니다(마태 20,24).

그런 모습들을 보면,

사도단 안에서의 서열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마태 16,18-19),

그를 사도단의 우두머리로 삼으신 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교계 제도가 확립될 때

베드로 사도의 수위권도 확립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약속하신 것은

글자 그대로 '예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자기들이 나중에 틀림없이 옥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높은 자리를 청하고,

서열 문제로 다투었다는 것은

그들이 세속적인 명예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인간의 욕망 가운데에서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은 명예욕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욕망은 다 버려도 명예욕은 끝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선행을 실천해서 칭찬과 존경을 받을 때

기쁨을 느끼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인데,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또 그래서 그 일을 하기 싫어하고,

그러면 그것은 이미 '죄가 되는 욕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보고와 요한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라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거절도 아니고 꾸중도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칭찬도 아니고 승낙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을 질문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더 높은 자리는 더 무거운 십자가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야고보와 요한은 '자리'만 생각하고 '십자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무엇을 청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결과보다 과정을 먼저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늘나라에 열두 옥좌가 실제로 있는지,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가 실제로 가장 높은 자리인지,

또 사도단 안에서의 실제 서열이 어땠는지,

그런 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하늘나라에서 어떤 자리에 앉아 있든지 간에

지상에서 충실한 사도로 살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점이고,

그 '자리'가 아니라 그분들의 지상 생애를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마태 20,22)." 라고 대답했고,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청한 것처럼

무엇을 마셔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어떻든 그들은 나중에는 자기들이 무엇을 청했는지,

또 무엇을 약속했는지를 깨달았고, 자기들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만일에 야고보와 요한이 아니라 유다가 청했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하셨을 텐데...

유다는 "그런 자리라면 앉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두 사도가 끝까지 충실하게 당신을 따르게 된다는 것을 예언하신 말씀인데,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3)."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무책임한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앞의 말씀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의 결정권은 하느님에게만 있다는 가르침이고,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 속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마치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제가 이런 일을 했으니 이 자리를 저에게 주십시오."

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이 내용과 직접 연결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 말씀은, 사도들이, 또 우리가 진짜로 쓸모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쓸모 있는' 자녀가 되지만,

그러나 우리의 '쓸모'는 우리 쪽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