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9,2-10)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마르 9,2-3)
당신의 본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일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이 이야기 앞에는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 말씀과(마르 8,31-33),
당신을 따르려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마르 8,34-38).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수난 예고 말씀 때문에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부활 뒤의 당신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일이기도 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얻게 될 행복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제자들이 단순히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본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황홀하고 행복한 어떤 상황을 체험했음을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다.",
또는 "그냥 이대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심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말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십자가 수난을 건너뛰고 바로 그 행복한 상태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심정을
나타낸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또 어떤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그곳으로 곧장 직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는 하느님 나라를 찾아서
무작정 헤매는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이 지금 계시는 그곳,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곳을 향해서 가는 생활입니다.
'언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모를 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바람과 반대되는 일이 생깁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라고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목적지로 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분부하십니다(마르 9,9).
이 분부는,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기 때문에 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활을 먼저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지상에서의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고향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그래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이 연상됩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가나안'으로 직진했는데,
가나안 주민들이 자기들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려고 했고(민수 14,4),
반란을 일으켰고,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민수 14,10).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영광, 그리고 이집트와 광야에서 내가 일으킨 표징들을 보고도,
이렇게 열 번 씩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
... 너희는 내일 발길을 돌려 갈대 바다 쪽 광야로 떠나라(민수 14,22-25)."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믿음이 없으니 너희는 고향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입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그 다음 세대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사십 년이 지난 뒤입니다.
민족 전체가 자격을 얻는 데에 사십 년의 광야 생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여호수아와 칼렙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십 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광야에서의 사십 년은 보속 기간이었습니다(민수 14,34).
그러나 여호수아와 칼렙의 경우에는 보속 기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증언하는
'증인'으로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사도들과 신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신 것은
그들에게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과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
즉 복음 선포와 사랑 실천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최종 목적지라고 해도
지상에서의 인생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속하면서
잃은 자격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이 될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이웃을 위해서 일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해당되든지 간에
하느님 나라에 빨리 가고 싶어서 자살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빨리 죽기를 소망해도 하느님께서 데려가지 않으시는 것은
살아야 할 이유가, 또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임무일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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