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열전 1250

[신 김대건·최양업 전] (68) 동정 생활 실천

조선 시대 박해와 위협에도 믿음의 열정으로 정결 지킨 신자들 ▲ 왼쪽부터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부부, 최필제 베드로, 조숙 베드로, 권천례 데레사, 황석두 루카. 동정 생활을 하는 교우들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는 당대 신자들의 생활상뿐 아니라 신심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글이 있다. 최 신부는 편지에서 교우들을 소개할 때 순교자들은 이름과 세례명을 밝히지만, 살아있는 신자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성과 세례명만 쓴다. 예를 들어 회장 하 아우구스티노, 양반 출신 안나, 14살 된 바르바라, 동정녀 김 아가타 등이다. 최양업 신부와 선교사들의 편지를 살펴보면 당시 조선 교회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동정 생활을 하는 교우들이 적지 않았다. “이제 막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 중 한 명은 36세이고 혼인을 했지만..

[신 김대건·최양업 전] (67) 조선 시대 성물

“조선 교우들 위해 묵주나 묵주 만들 도구라도 보내주시면…” ▲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을 방문할 때 교우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묵주와 성물 등을 챙겨갔다. 사진 속 묵주는 기해박해 무명 순교자의 무덤에서 발굴한 묵주로 당시 조선 교회 신자들 가운데 꽤 많은 이들이 묵주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려준다.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을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지 않았다. 신자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될 묵주와 성물을 형편이 되는 한 바리바리 싸들고 가 신자들에게 건넸다. 또 비신자에게 직접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천주교에 관해 궁금해 찾아온 이에게 최 신부는 교리서와 기도서, 교리문답책을 선물했다. 비록 묵주를 제외한 성물은 그냥 주지 않고 구매를 원하는 신자들에 한해 비용을 받고 전달했지만,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0) 풍성한 신앙 유산 깃들어 있는 배론성지

한국교회 기초 다진 신앙 역사의 숨결 고스란히 신해박해 이후 형성된 배론 교우촌 조선 유일의 신학교 ‘성 요셉 신학교’ 장주기 성인이 봉헌한 초가집에서 운영 황사영이 숨어 지낸 토굴도 보존돼 있어 1855년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이 모여들었던 배론 교우촌. 이곳에서 최양업은 부모님의 순교행적을 서한에 적어 내려갔다. 최양업이 서한을 보냈던 1855년 무렵, 배론에는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졌다. 배론 교우촌 회장이던 장주기 성인의 봉헌으로 마련된 세 칸짜리 작은 초가집에서 신학생들과 서양선교사들은 조선교회의 장밋빛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백운산과 구학산 산줄기 아래 고요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배론성지는 한국교..

[신 김대건·최양업 전] (66) 페레올 주교 선종

조선인 사제 양성 힘쓰며 14년간 헌신한 페레올 주교, 하늘나라로 ▲ 미리내성지 김대건 성인 경당 앞에 있는 페레올 주교의 묘. 조선 교회의 별이 지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장 밥티스트 페레올(Jean Joseph Jean Baptiste Ferreol, 1808~1853) 주교가 선종했다. 1853년 2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주교관에서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페레올 주교는 1852년 3월 말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직후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병에 걸려 고생을 했다.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었다. 당시 조선 교회 성직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신자들을 만나러 가야 할 곳이 많아서 눈과 얼음이 덮인 산들을 가로질러 매일같이 걸어 다녀야 했기에 오래지 않아 녹초가..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9)서양 선교사들이 전한 최양업의 이야기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모두에게 사랑받은 목자” 신학생 최양업 우수함 서한 통해 드러나 활동·선종·시신 이장에 관한 기록 남겨 사목순방 중 겪은 어려움 생생히 전해 최양업 선종 소식에 깊은 상실감 토로 안동교구 진안성지는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가 서울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위해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한 곳이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최양업이 신학공부를 하고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하는 동안, 많은 서양 선교사들은 스승이자 동료로 최양업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국적은 달랐으나 조선의 복음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했던 이들의 관계는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다. 신학생 최양업, 부제 최양업, 사제 최양업의 여정을 가족과도 같았던 서양 선교사들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

[신 김대건·최양업 전] (65) 한글 기도서와 한글 교리서 그리고 천주가사 편찬

한글 기도·교리서 편찬에 앞장서고 천주가사로 호교론 펼쳐 ▲ 최양업 신부는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겼다. 사진은 「천주성교공과」 절두산순교성지 소장본. ▲ 세례·견진·고해·성체성사 등 4가지 근본 교리를 154조목으로 나눠 문답식으로 설명한 「성교요리문답」. 한문본인 이 교리서를 최양업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 최양업 신부는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 섰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 천주가사 중 공심판가를 옮긴 필사본. 가톨릭평화신문 DB 한문 기도문 음으로만 읽어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8)최양업이 세상을 떠나고 152년 만에 전해진 두 통의 서한②

조선교회 신앙의 자유 위한 외부 세력 도움 호소 수탈과 흉년으로 민심 흉흉했던 조선 외세를 통한 개혁 바라는 이들 늘어나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외적 박해가 중단된 것으로 분석하며 우호조약 통한 종교보호 정책 등 희망 최양업이 처음 사목을 했던 차쿠성당. 만주대목구장이었던 베롤 주교와 최양업은 차쿠에서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중국 차쿠성당의 현재 모습.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초대 만주교구장이었던 베롤 주교는 만주, 요동, 몽고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854년 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서품식을 주례하기도 했던 그는 조선 신자들이 보내 온 박해 상황과 소식들을 교황청에 보고했다고 전해진다. 메스트르,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김대건, 최양업 신부 등의 조선 입국을 도왔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