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8월 19일 나해 연중 제20주간 수요일(성 요한 외드 사제)

dariaofs 2015. 8. 19. 06:11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는 1601년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아르장탕(Argentan) 근교 리(Ri)라는 마을의 유복한 가정에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되던 해에 캉(Caen)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결혼하기를 바라는 양친의 소망을 뿌리치고 1623년에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다.

 

파리(Paris)와 오벨빌리엘에서 수학한 그는 1625년 12월 20일에 사제로 서품을 받은 뒤 노르망디 지역에서 본당 사목에 전념하였다. 1625년과 1631년에 노르망디 지역을 급습한 전염병의 희생자를 돌보기 위해 활약하기도 했던 그는 이 시기에 설교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얀센주의(Jansenism)의 강력한 반대자로서의 명성도 획득하였다. 그밖에도 고해성사 등의 성무 활동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과 교류하였다.

오라토리오 회원으로서 사목활동에 종사하던 요한은 당시에 나타난 교회의 악한 표양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점차 성직자 교육을 등한시하던 오라토리오회의 활동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으며, 만약 각 성당의 사제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본당 사목 활동은 단지 일시적인 성공만을 할 수 있을 뿐이라며 성직자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타락한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목에도 흥미를 보여, 1641년 평신도였던 장 드 베르니에르(Jean de Bernieres)와 가스통 드 렌티(Gaston de Renty)와 함께 성체회, 성모 방문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캉에 ‘회개한 죄인들을 위한 보호소’를 세웠다.

요한은 1643년에 오라토리오회를 떠나 캉에서 새로운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창립한 사제회는 재속 사제회로서 교구 신학교에서 성직자 양성과 본당 선교 활동을 통해 신자들에 대한 사목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라토리오회 총장과의 불화 등의 이유로 그의 새로운 사제회는 오라토리오회와 얀센주의자들로부터 큰 도전을 받아 교황청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650년 쿠탕스(Coutance)의 주교가 교구 내에 신학교를 설립해 달라고 요청하여 활기를 띤 이 사제회는 1851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예수 마리아 수도회’로 공식 명칭을 정하였으며 ‘에우데스회’(the Eudists)로도 불린다. 또 같은 해 2월 8일 교구 주교로부터 캉에 개설한 보호소를 새로 구성해 ‘착한 목자회’로 승인을 받았으며, 1666년에 공식적인 수녀회로서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이 수녀회는 주로 ‘타락한 여성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전개하였다. 요한은 1653년에 리지외(Lisieux)에, 1659년에는 루앙(Rouen)에, 1666년에 에브뢰(Evreux)에, 1670년에는 렌(Rennes)에 신학교를 세웠다.

오늘날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예수 성심의 환시를 체험하고 그 신심을 전파시킨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0월 16일)처럼 예수 성심의 신심을 전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예수 성심의 공경과 신심이 전파되고 축일이 제정되도록 하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성모 성심 공경의 보편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 요한 에우데스는 1909년에 시복되었으며, 192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강론   :    마태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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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을 가지고 나가 하고 싶은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하느님도 시기하는 나?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간은 하느님도 시기하는 존재로 보시는 거라고 이해한다면

저도 하느님도 시기하는 존재일수도 있겠습니다.

 

시기에 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에 대해서 시기하는 것인데

인간이 설마 하느님도 시기하겠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도 시기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물론 교만함 때문에 하느님과도 경쟁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직접 시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교만하지는 않기에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시기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시기하는 것이라!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비유에서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시기에는 하느님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시기에는 하느님이 깊이 연루되어 있는데,

만약에 자신의 시기에 하느님이 연루되어 있음을 부정한다면

그 사람이 사실은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될 때

그가 잘해서 잘 되거나 운이 좋아서 잘 된다고 생각하지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게 해주신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신앙인이라면 내가 누구를 시기한다면

그가 잘되게 해주신 하느님을 시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아주 의미 있는 권고를 우리에게 합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비유에서 또 다른 차원도 성찰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나보다 더 잘 되는 것만을 시기하지 않고,

나처럼 잘 되는 것도 시기한다는 점인데

어쩌면 이런 시기가 더 고약한 시기일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이런 시기는 나만 잘 되기를 바라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잘 되는 것에 대한 시기는

나도 그처럼 되고 싶은데 못 되니까 하게 되는 시기,

그래서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는 시기이지만

나처럼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것은

자기만 최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훨씬 더 고약한 시기인 것입니다. 

 

나보다 더 잘 되는 것에 대한 시기는 낮은 자, 작은 자의 부러움의 시기라면

나처럼 잘 되는 것에 대한 시기는 지극히 교만한 자의 독점적인 시기입니다.

자기만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고,

다른 사람은 영원히 자기 밑에 있도록 짓밟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경쟁에서도 이런 것은 참으로 나쁜 것인데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에서도 자기만 하느님께 올라가려 하고

다른 사람이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더 나쁘지 않을까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