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일 월요일(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사제,1회) - 의심치 않고 자라는 믿음이 있을까?

dariaofs 2015. 10. 19. 05:37

 

 

에스파냐 중서부 에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의 알칸타라 지방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가라비토(Petrus Garavito)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6세 때에 만하레테스(Manxarretes)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엄격한 보속 생활을 실시하던 중에 바다호스(Badajoz)로 파견되었고, 152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에서 설교하면서, 로브레딜로(Robredillo), 플라센시아(Plasencia), 라파(Lapa) 그리고 에스트레마두라 수도원의 원장으로 봉사하였으며, 라파 수도원을 봉쇄수도원으로 요청하여 허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 한때 그는 궁중의 전속사제로 일하다가 1538년에는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다소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관구 총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하자 관구장직을 사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리스본(Lisbon) 교외 아라비다(Arabida) 산에서 성 마리아의 마르티누스 수도원의 형제들과 함께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따르려고 하였다. 관구 내에서 자신의 규칙이 통과되지 못하자 그는 코리아(Coria) 교구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새 수도원을 세울 허가를 교황 율리우스 3세(Julius III)로부터 받았다.

 

이것이 바로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수도원들도 그의 규칙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1561년에는 성 요셉 관구가 설립되었는데,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의 관할 아래 두게 되었다.

1560년 그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of Avila, 10월 15일)를 만나서 그의 고해신부 겸 상담자가 되었으며, 카르멜 개혁운동을 격려하였다. 그는 “기도와 묵상론”을 썼는데, 이것이 후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562년 에스트레마두라에서 사망하였고, 1622년 4월 18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된 후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1862년부터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위대한 신비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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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어떻게 믿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에 대한 오늘 로마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심이 없었을까?

아브라함은 태어날 때부터 믿음이라는 DNA를 갖고 태어나

불신이나 의심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을까?

 

제 생각에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의 조상이라 하더라도

본디 그렇게 태어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아닐 것이고,

만일 그렇게 태어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라면

그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고 불신과 의심의 사람이었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큰 믿음의 시련을 통해 믿음에 도달했을 겁니다.

의심이라는 믿음의 시련 없이 믿음은 자라지도 굳세어지지도 않지요.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련을 우리보다 더 많이 받았습니다.

 

늙은 나이에 하느님을 믿고 고향을 떠나라고 했을 때 어찌 의구심이 없고

나그네살이 하는 동안에도 어찌 의구심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늙은 나이에다가 아직 자식이 없는데도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처음부터 그리고 내내 철석같이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늘그막에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했을 때

하느님의 약속을 선선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하느님의 선하심은 더더욱 쉽게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심이 갔지만 믿기로 한 것이고,

이 믿음의 결단 때문에 믿음의 은총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렇게 말을 하곤 하지요.

일단 믿어보자!

 

아브라함은 매번 이렇게 믿기로 한 것이고,

의심과 믿음의 결단이 쌓이고 쌓여 큰 믿음, 굳건한 믿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의심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 의심하는 것은 좋고,

더 잘, 더 완전히 믿기 위해서 더 큰 의심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믿지 않기 위해서 의심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니, 어쩌면 믿지 않기 위해 의심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믿게 되었을 때 그 믿음이 더 강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이 더 나쁩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

자기 믿음에 대해 한 번도 의심치 않은,

그래서 자기 믿음에 대한 믿음이 사실은 없는, 그런 믿음이 문제입니다.

 

나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