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아시시의 성녀 아녜스 동정녀, 2회)

dariaofs 2015. 11. 19. 08:18

 아시시의 성녀 아녜스(1197-1253)는 친지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언니인 성녀 클라라의 결심을 몇일뒤에 수도원에서 결단력 있게 따랐다. 그뒤 피렌체에 새 수도원을 창설하기 위하여 떠났었고 그곳에서 아시시로 돌아와 성 다미아노에서 언니인 클라라 동생 베아트릭스 어머니 오르똘라나가 함께 생활한 곳에서 마지막 해를 보냈다. 천사적인 가난의 복음적 이상을 완전하게 살았다. 언니인 성녀 클라라의 뒤를 따라 세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강론   :   (루카 19,41-44)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루카 19,41-43)"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운명과 예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에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리고 아무도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믿음과 회개와 여러 가지 많은 노력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개하고, 믿음과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고 믿으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이 없다면, 그러면 '예언'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정해져 있지 않은 미래의 일을 어떻게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인가?

 

좋은 예가 '요나의 예언'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시키신 대로 니네베로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외쳤습니다(요나 3,4).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고 단식했습니다(요나 3,5-9).
그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셨고,
니네베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요나 3,10).
요나가 "니네베는 멸망한다." 라고 예언했는데도,
니네베라는 도시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요나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 된 것일까?
아마도 그래서 요나가 화를 냈던 것 같습니다(요나 4,1-2).
자기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 되어버렸고,
자기는 거짓 예언자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타이르시는 말씀을 보면(요나 4,11),
원래 하느님의 뜻은 '니네베의 멸망'이 아니었고,
'니네베의 회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에게 '회개'를 선포하게 하시지 왜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을까?
어쩌면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시키신 선포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였을 것입니다.
(요나가 회개를 빼버리고 멸망만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면, 멸망 선포는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충격요법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 예언'도 같습니다.
멸망이 확정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해도' 멸망하게 된다는 예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니네베 사람들과는 달리 거의 대부분
회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당하게 될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에도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했지만 주민들이 백 퍼센트 전멸당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은 '오늘이라도'(지금이라도)로 해석됩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알았더라면'은 '믿고 실천했더라면'입니다.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는 "모르고 있다." 라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거부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심판과 멸망의 때'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복음 말씀의 '예루살렘'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라는 경고는 오늘도 유효합니다.
언제라도, 또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한 마리 양을 잃은 목자의 심정을 나타냅니다(루카 15,4).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버렸을 때,
아마도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단 하루도 편하게 먹거나 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 속의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을 생각하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배가 고파서 회개했습니다(루카 15,14-19).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편안할 때에는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다가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는 모습.
그러나 진짜로 지혜로운 사람은 편안할 때에 더 회개합니다.

 

아마도 분명히, 심판과 멸망이 닥치게 되면 누구라도 회개하려고 서둘 텐데,
그때는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이고, 다들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회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언젠가 심판의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