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프레스부르크(Pressburg)에서 국왕 앤드레 2세(Endre II)와 왕비 제르트루다(Gertruda)의 딸로 태어난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4세 되던 해에 튀링겐(Thuringen) 영주 헤르만 1세(Hermann I)의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하였다. 비록 이 결혼이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졌지만 화목하고 평화스러웠다고 하며 6년 동안을 서로 만족스럽게 살았다. 그들의 집은 아이제나흐(Eisenach) 근교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있었고 자녀는 세 명을 두었다.
그러나 1227년에 루트비히 4세가 풀리아(Puglia)로 출정하는 십자군에 가담하였다가 9월 11일 이탈리아 남동부 오트란토(Otranto)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온갖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다가 자선활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집안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녀는 자녀들을 위하여 대비책을 마련한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어 세속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녀는 헤센(Hessen)의 마르부르크(Marburg) 성에 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마르부르크의 콘라트(Conrad)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았는데, 그녀의 영적 생활은 날이 갈수록 풍요롭게 변화되었다. 누구나 놀랄 정도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깊은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감쌌던 것이다. 그녀는 운명하기 4년 전에 자신을 쫓아냈던 시동생으로부터 마르부르크 성으로 돌아올 허가를 받았고 또 그녀의 아들에게 백작을 승계시킬 수 있었다.
여왕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직접 음식을 날라주고 옷을 지어 준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녀는 독일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녀가 되었다. 1231년 24살의 나이에 마르브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불과 24년밖에 살지 못하고 마르부르크에서 운명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작은 형제회 재속 3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는 1235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Perugia)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14세기 이후 엘리사벳의 성화는 망토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몰래 빵을 감추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빵 제조업자와 빵 집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루카 19,1-10)
<오늘>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에게 하신 말씀인데,
그를 제자로(신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때는 항상 '오늘(지금)'입니다.
'내일'도 아니고 '나중에'도 아닙니다.
'얼른'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이 말은 '지금 바로 즉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즉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미적거리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미루지 말고 '곧바로' 해야 합니다(마르 1,18).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하룻밤 신세를 지게 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를 '신앙의 길'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6)."
여기서는 '얼른'이라는 말과 '기쁘게'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처음에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겉으로만 보면,
자캐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만 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는데(루카 18,38), 자캐오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캐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고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갈증이나 갈망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 인생의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마음속으로는 예수님께서 불러 주시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만일에 자캐오가 예수님을 본 것으로만 만족하면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기쁘게' 응답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내용에서 묵시록 3장에 있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니,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문을 열어 드려야 합니다.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일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인 자캐오는 곧바로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이제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선언이고,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을 살겠다는 서원이기도 합니다.
이제까지는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돈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렇다면 재산의 전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지 왜 반만 주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실제로는 자캐오가 전 재산을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재산의 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머지 반으로는 횡령한 것을 갚고.
(세관장이면서 부자였으니까
알고 했든지 모르고 했든지 간에 부정하게 얻은 수입이 많았을 것입니다.)
자캐오의 서원은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하게 된 일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맞아들인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인생을 예수님께 맞추어서 변화시키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저절로 삶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캐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ㄴ)." 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도 '오늘'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막연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캐오가 재산을 포기했기 때문에 구원이 내린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이미 내렸습니다.
자캐오의 서원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루카 19,9ㄷ)." 라는 말씀은,
자캐오가 구원을 받게 된 이유에 관한 말씀으로 볼 수도 있고,
구원을 받게 된 후의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죄 속에서 살고 있었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는 구원을 받음으로써 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자격이 원상복구 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녀'를 뜻합니다.)
그러나 자캐오가 받은 구원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부터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자캐오의 서원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아마도 자캐오는 서원을 하고 나서 즉시 실천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이 말씀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루카 19,7)."이라고 하면서
투덜거린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잃은 이들'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자리에는 자캐오 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루카 19,3),
왜 자캐오만 구원을 받았는가?"
구원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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