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11월 4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 사랑의 빚을 져라!

dariaofs 2015. 11. 4. 07:12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또는 가롤로)는 1538년 10월 2일 이탈리아 북부 마죠레 호수 근처의 아로나 성(城)에서 지베르토(Giberto Borromeo) 백작과 교황 비오 4세(Pius IV)의 여동생 마르게리타(Margherita de Medici)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12살 때 산 그라시니아노(San Gratiniano) 수도원에서 삭발례를 받았다. 그 후 밀라노로 가서 알치아티(Alciati)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1552년 파비아(Pavia) 대학교에 진학하여 1559년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559년 12월 25일 그의 외삼촌인 지안 안젤로 추기경이 비오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새 교황은 조카인 카롤루스 보로메오를 로마(Roma)로 불러들였다. 1560년 추기경으로 서임된 보로메오가 가장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일했던 분야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으로서의 직무였다. 특히 그는 트렌토 공의회(Council of Trento) 제3회기 동안 그의 외삼촌인 교황에게 가장 열성적이고 믿음직한 협력자이자 지원자였다. 카롤루스는 공의회 운영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마지막 회기에서 칙서들을 성문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562년 그의 형 페데리고(Federigo)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보로메오 가(家)의 수장 직책을 거절하고 1563년 7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로서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더욱 분발하였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가 요청한 교리교육과 미사 전례 그리고 성무일도 작업들을 두루 감독하였으며,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여 그가 대주교로서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밀라노 교구를 모범적인 주교좌로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또한 그는 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태도 개선을 위하여 유익한 기준을 마련하였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 설립, 어린이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그리스도인 교리회 설립 및 자신의 교구 내에 거주하는 예수회를 격려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제도적으로 보완하였고, 프랑스 두에(Douai)의 영국계 대학을 지원하는데 있어서도 호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에 11차례의 교구 시노드(Synod)와 6번의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후보자들을 위한 단체의 성격을 지닌 ‘성 암브로시우스의 헌신회’(지금은 성 카롤루스의 헌신회)를 설립하였고, 주로 설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타락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데 정력을 기울였다.

1567년 그는 주교의 관할권에 대한 밀라노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나쁜 생활에 물든 평신도 여러 명을 투옥시킨 것으로 주교좌가 시당국에 의하여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그는 그들을 모두 단죄하였다. 재차 그의 주교직이 산타 마리아 델라스카라의 시의원들로부터 도전을 받자, 교황은 그를 후원하고 시의회는 그들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는 어느 자객으로부터 상처까지 입었다.


1576년 페스트와 기근으로 온 주민들이 큰 난리에 빠졌을 때,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3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여 이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시의회와 교회 관할권 사이의 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카롤루스는 그 때마다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영국 선교 길에 오르는 수많은 젊은 사제들을 접견하고 지원하였으며, 1583년에는 스위스 교황사절이 되어 그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를 상대로 설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584년 11월 3일 밤에 밀라노에서 사망하여 주교좌성당의 중앙 제대 아래 묻혔다.

그는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다. 비록 그가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1610년 11월 1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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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 13,8)  


다른 빚은 지지 말아야 하지만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사랑의 빚은 적극적으로 지라는 것인가요, 아니면

사랑의 빚은 지지 않을 수 없으니 져도 된다는 뜻인가요?  


우선의 사랑의 빚이란 무엇인지부터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이것을 옛날 번역과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옛 번역은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라고 한 다음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사랑이라고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사실 사랑의 의무를 다하라는 옛 번역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요.

다른 의무는 법에 정해진 대로만 하면 그 한계가 있지만

사랑이라는 의무는 해도 해도 그 끝이 없는 것이며, 하지만

가장 작은 사랑이라도 최소한의 사랑인 법보다는 큰 사랑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의무는 아무리 했어도 다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빚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법의 요구에 의해서 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더 하려는 것이니 의무를 다 한 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어지는 율법조항들이 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요구사항이 되고 강제조항이 되겠습니까?

가장 진실한 사랑을 하려는 사람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말이,

어떠한 생명이라도 존중하는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에게 탐하지 말라는 말과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에 틀림이 없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좀 다른 관점에서도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의 의무가 있는 사람일뿐 아니라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요, 빚을 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관점 말입니다.  


우선 우리는 다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부모에게 빚을 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 빚진 것 없는 것 같은 사람에게도 빚을 진 사람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맹수와 강도가 출몰하는 아주 위험한 길을 밤에 원수와 함께 갑니다.

이때 같이 갈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나에게 사랑인데,

그 원수가 등불도 들고 있다면 그가 비록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비추는 거라 해도 나는 원수에게 사랑의 빚을 진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랑의 빚을 많이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사랑의 빚을 서로서로 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빚을 져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사랑의 빚을 지지 않겠다는 것은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려고 하시자

베드로 사도가 발만은 안 된다고 거절하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는 거라고 하시며

제자들도 당신처럼 하라고 본을 주시는 거라고 하셨지요.  


개인주의가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요즘, 꽤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부담이고, 사랑보다 부담이 싫으며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이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것이 편하고 자유롭다고 하는 외로운 영혼들에게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빚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