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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특별 희년]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원목봉사자 허정애(엘리사벳)씨

dariaofs 2015. 12. 31. 05:00
고통으로 닫힌 마음, 기도와 위로로 열어요


▲ 15년 동안 원목실 없는 병원에서 봉사자들과 환자들을 영적으로 돌봐온 허정애씨. 이지혜 기자


“안녕하세요. 성당에서 왔습니다. 환자분 중에 천주교 신자 계세요?”

지난 12월 14일 서울 노원구 동일로 상계백병원 병실.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허정애(엘리사벳, 64, 서울 중계동본당)씨가 봉사자들과 함께 환자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묻는다.

서너 개 병실을 돌았을까. 한 환자가 허씨를 향해 반갑게 인사한다.

“치료는 잘 되고 있죠? 병원에 오시니 기운이 없으시죠?”

간농양으로 병원에 입원한 김희주(모니카)씨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인다.

“너무 일만 하니까 하느님이 쉬는 시간을 마련해 주신 거예요. 숨 가쁘게 살다 보면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잖아요.”

김씨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속상하고 힘겨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얼마 전까지 도시락 봉사를 했었는데, 그걸 못하게 돼서 안타까워요. 하느님이 병을 주셨으니, 치료법도 주시겠죠?”

허씨와 봉사자들은 김씨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함께 기도해준다. 기도에 이어 병자 영성체와 함께 병자성사,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미사 시간도 알려준다.

허씨는 이렇게 육신에 들어선 병마와 외롭게 투쟁하는 환자들을 15년째 만나고 있다. 병원에는 천주교 원목실이 없다. 원목 사제와 수녀도 없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활동해온 허씨는 2000년 병원 인근 성당의 가정간호사였던 박명구(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와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가톨릭 교우회’라는 이름으로 환자 방문을 하면서 원목 봉사를 시작했다.

“사람이 가장 힘들 때는 아플 때죠. 제가 몸이 약해서 아팠거든요. 그래선지 천직(?)처럼 아픈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상계백병원 가톨릭 교우회 회장인 그는 1주일에 2~3차례 병원에 들러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신자 환자들의 입·퇴원 상황을 확인한다. 한 달에 100여 명의 환자를 만나는 그가 지금까지 만나온 환자는 무려 1만 2000여 명.

환자들과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는 허씨는 병원비로 허덕이는 환자가 있으면 구청이나 주민센터 복지과로 연결해 병원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허씨를 만나 오랜 냉담을 푸는 환자도 적지 않다. 기억에 남는 환자도 많다.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대학생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연명하다 위암에 걸린 거예요. 아들을 홀로 간호하느라 녹초가 된 엄마를 쉬게 하도록 회원들이 팀을 짜서 3~4시간씩 돌아가며 아들을 간호했습니다.

 

아들은 세상을 떠났고, 엄마의 친정식구 모두가 세례를 받았죠. 10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연락하고 지냅니다.”

병원에는 봉사자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외투와 소지품을 보관할 수 있는 작은 사물함 하나만 있다. 회원들은 봉사자로서 병원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엄격하게 지킨다.

 

환자 방문 시 음료수 한 잔도 절대 받지 않으며, 쓸데없는 수다를 나누지 않는다. 의료진들이 회진을 돌 때는 진료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피한다.

“우리가 병실을 방문해 ‘신자 있으세요?’라고 묻는, 그 몇 초의 순간이 신자들 마음을 움직이는 기적 같은 시간이에요. 냉담하던 분들은 그 순간에 망설이다가 신자임을 밝히거든요.”

신자라고 밝히는 순간, 그 환자는 회원들의 기도 선물과 영적 위로를 넘치도록 받는다. 투병 생활에 동행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허 회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10년째 환자들을 위해 매달 한 차례 미사와 병자 영성체, 고해성사를 해주고 있는 현동준(서울시의료원 원목 담당) 신부는 “원목실도 없고 옷 갈아입을 공간도 없이 아주 열악한 환경이지만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허 회장님의 열정은 그 무엇보다 뜨겁다”고 말했다.

“간혹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필요하면 성당으로 찾아오는데 왜 찾아다니느냐고.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병들고 소외된 삶을 사는데 가난하기까지 하면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냉담자가 아프다고 해서 스스로 성당에 못 찾아와요.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예요.”

그는 지난 11월 말 레지오 마리애 서울 세나뚜스 단장에 선출됐다.

이지혜 기자



취재후기

▲ 허정애 회장은 회원들과 함께 입원 중인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입원자 카드를 작성해 영적으로 돌본다.


병원은 내 가족이나 친구가 입원하지 않고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1시간 넘게 허 회장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데 등에는 땀이 차고, 병원 실내 공기가 좋지 않아 답답했다. 잠시 앉아 쉴 공간도 없었다.

그는 인체에 해로운 바이러스가 떠다니는 병원에서 왜 이렇게 슬픈 얼굴들을 찾아다니는 걸까. 허 회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봉사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원하시는 봉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는 것이다.

그는 병실을 하나하나 방문해 낯선 환자들의 눈을 마주치며 성당 다니는 분을 애타게 찾았다.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 애타는 마음의 깊이는, 마치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까지 방영한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주인공 같았다.

 

‘TV는 사랑을 싣고’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추억 속의 주인공을 찾아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마치 고등학교 동창생을 찾듯 천주교 신자를 찾아다녔다.

그가 그렇게 찾아낸 신자들은, 정말 허 회장의 고등학교 동창인 것 마냥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병상 에서 외로이 투병 생활을 하던 환자들은 고마워서 운다.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가 방문한 것도 아닌데, 하느님 곁을 떠나있던 환자들은 더 큰 신앙의 위로를 받는다. 하느님의 자비가 별빛처럼 쏟아지는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