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1월 26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dariaofs 2016. 1. 26. 07:56

 


리카이니아(Lycaenia)의 리스트라(Lystra) 태생인 성 티모테우스(Timotheus, 또는 티모테오, 디모테오)는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대교에서 개종한 에우니케(Eunice)의 아들이다.


그는 성 바오로(Paulus)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할 때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성 바오로의 친구이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사도 16,1-4). 그는 혹시 말썽이 날까봐 할례를 받은 후 바오로의 제2차 전교 여행을 수행하였다.


바오로가 유대인의 적개심 때문에 베레아(Berea)를 몰래 빠져나갈 때, 성 티모테우스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 파견되어 그곳의 상황을 보고하고,


또 박해 중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였다. 58년 성 티모테우스와 에라스투스(Erastus)는 마케도니아(Macedonia)로 파견되었으며, 그 후 코린토스(Corinthos)로 가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명심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바오로가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투옥되고 또 로마(Roma)로 이감되었을 때, 성 티모테우스도 같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 후 그는 에페수스로 가서 그곳의 초대주교로 봉직하였다.


그는 디아나(Diana)를 공경하는 카타고리아의 이교 축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티모테우스에게 보낸 바오로의 두 편지는 65년경에 마케도니아에서 썼을 것이다.

 

 


성 티투스(또는 티토, 디도)는 사도 바오로(Paulus)에 의해 개종한 후 그의 비서가 되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그를 코린토스(Corinthos)로 파견하여 오류를 시정케 하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헌금을 모금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사도 바오로에 의하여 크레타(Creta)의 주교로 축성되어 바오로의 사업을 이어나갔다.


그 후 그는 달마티아(Dalmatia)를 방문한 뒤 크레타로 돌아와서 운명한 듯하다. 그는 법률가 제나가 쓴 “티투스행전”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성 바오로로부터 받은 편지의 주요 내용은 영적인 권고를 비롯하여 착한 목자가 지녀야할 자질 및 크레타 신자들에게도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다.
 


강론   :   (루카 10,1-9)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은(루카 10,1-12),
일차적으로는 선교사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지침들인데,
넓게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이 지켜야 할 신앙생활 지침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에서 '일꾼'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일꾼이기도 합니다(마태 21,28-31).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사람들은 많은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적다." 라는 뜻이지만,
"되찾아야 할 자녀들의 수는 아직도 많고, 되찾은 자녀들의 수는 아직도 적다."
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성과를 거두어서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일꾼이 될 수 있게('더 많은 자녀를 되찾을 수 있게')
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항상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를 되찾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일이니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당연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하여라." 라는 말씀에는
"도움을 청하여라." 라는 뜻보다 더 깊은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니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세속적인 방식으로 하면 안 되고,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해도 안 되고.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3-4)."


여기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을 '이리 떼를 대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려면 믿음, 청빈,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오직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세속의 물질에 기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은 오직 복음뿐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선교활동은 사람들에게 어떤 물질적인 것을 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빈손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서 그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리 떼'는 안 믿는 사람들과 박해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변화시켜서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되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되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 복음일 수도 없고, 그런 방식으로는 이리 떼가 양들로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양들이 이리 떼로 '변질'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양들은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옛날과 같은 종교박해는 없다고 해도,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박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특히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할 때, 교회 안팎에서 박해를 받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세속적인 방식으로 맞서 싸운다면
양들이 이리 떼로 변질되는 일이 될 뿐입니다.
또 박해를 무서워하거나, 박해받는 일이 너무 피곤해서 뒤로 물러선다면,
그것은 '양'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이리'로 사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는 말씀 뒤에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혜, 겸손, 온유, 사랑으로 이리 떼를 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


신앙인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고, 평화를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평화'입니다.
독재자의 억압에 굴복해서 악을 악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선을 선이라고 말하지 못하면서 조용히 지낼 때,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거짓 평화일 뿐입니다.
선을 선으로 살아 있게 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악을 적극적으로 물리치려고 노력할 때,
그때 예수님의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7-8)."


이 말씀은,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22)." 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일꾼을) 먹이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루카 12,30).
만일에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떤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줄 수 있을까?
믿음 없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일 수가 없습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9)."


하느님의 나라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징은 '사랑'입니다.
병자들에게(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일은
그 자체로 복음(기쁜 소식)이 되고, 평화를 전해 주는 일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전주교구 상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