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8)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불과 유황의 연기가 그 구덩이에서 영원토록 올라올 것이며 그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그 이름의 낙인을 받는 자는 밤에도 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묵시14,11)
종말에 대한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종말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대부분 '상징'과 '비유'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성서에 나오는 천국의 이미지들인 하프나 면류관, 금 등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하프'는 기쁨과 평안을 강렬하게 암시하는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고, '면류관'은 하느님과 영원히 일치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광채와 힘, 기쁨을 함께 누린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금'은 시간에 매이지 않는 천국의 영원함과 귀중함을 암시합니다.
또한 지옥의 '유황불'이나 '구더기' 등은 이승에서처럼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상징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 천국과 지옥, 연옥에 대하여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합시다.
* 지옥
근래에 와서 신학자들은 지옥에 대해서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과연 성서가 말하는 그런 지옥이 존재할까?"
"그런 지옥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만들어 놓으셨을까?"
고민한 결과 가톨릭 교회는 다음의 결론을 취하였습니다.
첫째, 지옥은 불이 활활 타거나 사람을 질식시키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에 처하는 고통의 상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기를 고집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단절되는 것 자체가 영원한 고통이며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이란 이처럼 하느님과 복된 분들과 이루는 친교를 스스로 '결정적으로' 거부한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 이런 지옥의 고통은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떨어져 나감으로써 초래하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곧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이에 대한 <가톨릭교회교리서>의 내용을 적어보겠습니다.
1033. (생략)...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복된 분들과 이루는 친교를 스스로 결정적으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
1034. 예수께서는 끝까지 믿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마태5,22.29;13,42.50;마르9,43-48 참조) "지옥"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 곳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된다(마태10,28 참조).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파견할 것이고 그들은 (...) 범법을 일삼는 자들을 그의 나라에서 그러모아 그들을 불가마에 던질 것입니다"(마태13,441-42) 하고 엄숙히 예고하시며,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마태25,41) 하고 단죄하실 것이다.
1035.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친다. 죽을 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후 즉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 곳에서 지옥의 고통, 즉 "영원한 불"의 고통을 겪는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지옥에 대한 성서의 단언과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즉,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과 '의지'를 일깨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 연옥
가톨릭 교회는 '연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연옥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의 마카베오 후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이방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유다인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우상의 부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들이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사실은 의로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12,45).
만일 천국과 지옥 밖에 없었다면 유다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 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반쪽 의인'인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전에 거치는 정화의 단계를 연옥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외에도 구약에서 죽은 이를 위해 베푸는 선행을 강조하는(따라서 연옥의 존재를 시사하는) 대목을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산 사람 모두에게 은덕을 베풀 것이며 죽은 사람에게까지도 은덕을 베풀어라"(집회7,33;토비트서 참조).
또 베드로1서의 말씀도 연옥을 시사합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3,19).
요컨대 교회의 오랜 전통은 연옥이 실재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죽은 후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030)
이 정화를 우리는 연옥이라고 합니다. 결국 연옥이란, 죄스런 인간이 거룩하고 무한하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치르는 정화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넓게 봤을 때 연옥은 천국의 일부입니다.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만드신 일종의 반지옥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반천국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 천국
<가톨릭교회교리서>를 먼저 인용합니다.
1023.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는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참 모습을"(1요한3,2) 맞대고 보기 때문에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될 것이다.
1024.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와 함께 하는 이 완전한 삶, 삼위일체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 하는 삼위일체의 생활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른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지고하고 결정적인 행복의 상태이다.
즉, 천국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이 된 모든 사람들의 복된 공동체입니다. 천국은 완성된 형태의 사랑이며 통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고 서로 사랑하고 있는 곳에 이미 천국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천국, 지옥, 연옥에 대한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 미래에 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서 어떤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현재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미래'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결국 '현재'의 연장이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도서
차동엽,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2>, 에우안겔리온, 2003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가톨릭교회교리서 제1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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