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루카 9,51-62)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자기네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사마리아인들은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행을 모욕하고 박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그 마을을 불살라 버리고 싶어 합니다.
인간적인 감정에(복수심에) 사로잡혀서 복수를 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두
사도의 말은 하느님께 천벌을 내려 달라고 청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를 꾸짖으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살라 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들이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는 기도.)
이 말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불행을 예고하신 일과
모순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이 말씀에 나오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마을이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많이 행하신 마을입니다.
또 이 말씀은 지금 당장의 불행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고,
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는 ‘사랑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2) 어쩌면 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권한과 권능을
한 번 사용해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 그들에게 이르셨다.
...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1-5)”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경고하는 표시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두 사도는(다른 사도들도) 경고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아예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심판의 권한을 사용하려고 한 것이 되고,
당연히 그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가
됩니다.
(자기들이 권한을 사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더라도,
즉 하느님께 천벌을 내려 달라고 청하기만 하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심판과 천벌을 청하는 것도 죄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도 두 사도와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서 두 사도처럼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또는 인간들의 악행을 보았을 때,
하느님께서
천벌을 내려 주시기를 바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 종교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사용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박해를 받던 시절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그 ‘영향력’을
지금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서 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세 시대의 종교재판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도 유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으면 안 됩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종교는 세상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으로 변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타락이고
변질입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 미치는 진정한 영향력은 바로 그 ‘섬김’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당연히 ‘섬김’과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영향력이 행사되어야 합니다.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사용하면 안
됩니다.
종교는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반자가 될 뿐입니다.
사실 최후의 심판 날이 되면
종교 자체도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송영진 모세 신부 (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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