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9월28일 다해 연중 제26주간 수요일(성 빈체슬라오 순교자,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동료 순교자들)

dariaofs 2016. 9. 28. 06:53



성 빈체슬라오 순교자

체코 서부 보헤미아의 통치자였던 보리보이(Boriwoj)와 그의 아내 성녀 루드밀라(Ludmilla, 9월 16일)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그의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 강력한 힘을 갖고 있던 체크가(家)는 새롭게 등장한 그리스도교를 극구 반대하였다.


915년경 보리보이의 아들 라티슬라프(Ratislav)가 전국을 통치하게 되었고, 슬라브족 이교도인 벨레시안스의 딸 드라호미라(Drahomira)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프라하(Prague)에서 태어난 벤체슬라우스와 볼레슬라우스가 그들이다.

성 벤체슬라우스(또는 벤체슬라오)는 할머니인 성녀 루드밀라의 배려로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고, 보데크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슬라브어를 익혔다.


그러나 920년경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부친이 마가르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어머니 드라호미라가 섭정을 하였는데, 그녀는 반그리스도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적인 벤체슬라우스와 그의 어머니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929년 독일의 하인리히 1세 황제의 침략을 받은 벤체슬라우스는 무력에 의해 국가가 패망하는 것보다 그를 카알 대제의 후계자이자 대군주로 인정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항복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로써 그는 독일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적인 기치 아래 슬라브족의 통합을 진행시키려 하였다. 그는 성 비토(Vitus)를 모시는 성당을 프라하에 세웠고 독일과의 우의를 돈독히 했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그로인해서 도처에서 귀족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929년 9월 그는 동생 볼레슬라우스(Boleslaus)의 초대를 받고 성 코스마(Cosmas)와 성 다미아누스(Damianus) 축일 기념행사를 지내려고 스트라 볼레슬라프(Stara Boleslav)로 갔다.


축제일 저녁 그가 위험에 처한 줄을 알았다. 벤체슬라우스는 9월 28일 미사에 참례하러 가던 도중 동생과 그 일파에 의하여 처형되었는데, 성당 문 앞에 쓰러지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동생아, 나는 너를 용서한다.” 그 후 그는 즉시 순교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았고, 보헤미아 전 주민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지금은 체코의 수호성인이다.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동료순교자들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Laurentius Ruiz, 또는 라우렌시오 루이스)는 첫 번째 필리핀인 성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순교한 첫 필리핀 순교자이다.


그는 1600년경 마닐라의 비논도(Binondo)에서 신자였던 중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국어와 타갈로그어를 배웠다. 그리고 도미니코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스페인어를 배웠다. 그는 비논도 성당의 복사로 활동하였고 성사 보조자와 성사 기록자로 봉사하였다.


그는 아마도 서예로 생계를 유지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사적 혹은 공적인 용도의 서류를 아름다운 필기체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였다. 그 직업은 안정되고 교육받은 사람임을 암시하는데, 당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는 사실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1636년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운한 사건에 연루되어 살인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릇된 재판으로 사형을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성 라우렌티우스는 필리핀을 떠나기 위해 배를 탔다.


그런데 그 배에는 세 명의 도미니코회 신부인 성 안토니우스 곤잘레스(Antonius Gonzalez), 성 귈레르무스 쿠르텟(Guillermus Courtet), 성 미카엘 데 아오사라사(Michael de Aozaraza)와 일본인 사제인 성 빈첸시오 시오주카 드 라 크루스(Vincentius Shiwozuka de la Cruz)와 평신도이며 나환자인 교토(Kyoto)의 성 라자루스(Lazarus)가 타고 있었다.


그는 바다에 나오고 나서야 그 배가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일본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본의 오키나와(Okinawa)에 도착한 성 라우렌티우스와 동료들은 곧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체포되어 나가사키(Nagasaki)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갖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으나 용감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신앙을 철회하지 않았고 그의 사형집행인에게 자신은 하느님을 위해 죽으며, 자신이 죽는 대신 수천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1637년 9월 27일 그는 교수대에 거꾸로 달려 구덩이로 떨어졌다. 이틀 동안의 고통 후에 그는 출혈과 질식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와 동일한 방법으로 처형된 15명의 동료 순교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1년 2월 18일에 마닐라에서 시복되었고, 1987년 10월 18일 같은 교황에 의해 로마(Roma)에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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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주님을 따름과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세 가지 경우는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 데 모아놓은 것일 겁니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없음은 물론 얘기(story)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얘기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없어서 얘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가 궁금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에 따르기를 포기했는지,

죽은 이의 장사는 죽은 자가 치르게 하라는 무지막지한 말에도 따랐는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시다시피 그것은 알 수가 없지요.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사실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훈을 주기 위한 것으로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것입니까?

   

제 생각에 이 교훈은 주님을 특별하게 따르려는 성직자 수도자가

1차적인 대상이지만 꼭 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합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을 따름(Sequela Christi)은 주님을 닮음(Imitatio Christi)과 함께

주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은 어떤 길입니까?

   

첫째는 매우 불편하고 불안한 길입니다.

머리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은 먹고 자고 쉴 곳이 하나도 정해지지 않아

불편할 뿐만 아니라 그래서 불안하기까지 한 삶입니다.

   

지난여름 저와 30여 명의 포르치운쿨라 행진단은

그야말로 이런 불편하고 불안한 행진을 하였지요.

어떻게 보면 무모하다고 할 이런 행진을 왜 하고,

뭣 하러 이런 고생을 사서 한 것이며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길을 끝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고

어떤 불편과 불안도 무릅쓸 수 있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불편과 불안의 길이지만 열정과 열망의 길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죽은 자의 장사는 죽은 자가 치러야 하는 길입니다.

   

사실 머리 기댈 곳 없는 불편하고 불안한 길을 가는 것은

자기가 힘든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무릅쓸 열정이 있기만 하면 되는 거지만

죽은 자의 장사마저 팽개쳐야 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문제고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팽개치고 망쳐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개인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아픈 길이며

인간으로서 해야 할 제일 크고 중요한 일조차도 팽개칠 정도로

주님을 따르는 일이 제일 중요한 사람만이 떠날 수 있는 길입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는데 성당일 때문에 거기에 빠지는 거지요.

   

세 번째로 이 길은 뒤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이는 과거지향적이지 말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말씀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관계의 재편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면 옛 관계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모든 애착을 끊는 것, 이것이 큰 아픔이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픔을 주며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게 더 큰 아픔이지요.

그러니 이 길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끊어야만 하는 매정한 길이지만

이 매정한 짓을 할 정도로 주님을 사랑해야만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아무튼 주님을 따르는 길은 불편함은 무릅쓰고,

인간사 가장 중요한 일과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 포기해야 하는 길이며,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가장 어리석고 몹쓸 길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