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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5) 김덕수(바오로) 사물놀이 명인

dariaofs 2017. 2. 5. 00:30

바티칸에서 사물놀이 한 번 신명나게 펼쳐봤으면!



▲ 전통연희상설 공연장에서 장구를 메고 선 김덕수씨. 이힘 기자



▲ 1982년 미국 텍사스 달라스에서 열린 세계타악인대회에서 사물놀이 공연 후 청중들이 기립해 환호하고 있다.



▲ 2016년 미국 시애틀 세계 음악 전문교육가 과정 워크숍 중 외국인에게 장구를 가르치고 있는 김덕수씨.



                   ▲ 2016년 마재성지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김덕수씨.



  ▲ 김덕수(오른쪽)씨가 서종빈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힘 기자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극장 무대에서 인터뷰했다. 3대째 남사당패의 피를 물려받은 ‘오리지널 광대’다. 현재 예순다섯인데 60년 동안 사물놀이를 한 전통 예인이자 명인이다. 김덕수(바오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다.


다섯 살 때부터 해온 자기 일을 사랑하고 배운 것을 후학들에게 교육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남사당패를 따라 전국을 누비며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졌고 사물놀이로 전 세계에 전통 한류의 초석을 닦았다.


김덕수의 사물놀이를 접하면 돈과 명예가 거추장스럽고 인종과 종교, 배고픔과 설움을 모두 잊게 한다. 어깨춤을 들썩이며 한형제가 되고 평등한 인간이 된다. 그 현장에서 하느님을 느낀다는 김덕수 명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저마다의 소리가 허공을 향하고 있다. 사물놀이의 타악기도 각각의 소리는 둔탁하다.


그러나 꽹과리와 징 그리고 북이 장단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장구가 합세해 음악으로 승화된다. 사물놀이처럼 우리 사회가 화합과 통합의 아름다운 화음을 낼 그 날을 그려본다.

서종빈 기자

▶ 인터뷰하는 이곳은 대한민국 최초의 전통예술 공연장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가장 한국적인 공연은 사실 마당문화잖아요. 그런데 마당이 사라져버린 거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실내 공간화했습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잊으면 안 되고 지켜야 할 삶 속의 기본 중에 하나가 전통공연 예술 분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어떻게 하든지 우리끼리 꾸려가 보자고 해서 사물놀이 전통연희상설공연장을 만들게 됐고요. 벌써 10년이 됐네요.

▶ 김덕수 교수님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면 많은 분이 놀라시는데요. 어떻게 입교하시게 됐는지요.

사실 뱃속에서부터 입교한 것 같아요. 어머님은 평생 머리 안 자르고 쪽지시고 매달 초삼일이 되면 달 밑에서 정화수 떠놓고 비셨는데 어느 날 머리를 자르시고 천주교에 입교하셨어요. 세례명은 마리아십니다.


그래서 저도 매일같이 하느님께 기원하는 마음으로 연주해 왔는데 육십이 넘은 어느 날 놀라움이 저에게 생긴 겁니다. 사실 음악이나 예술은 어느 나라에 가든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서로 화합하면서 살자는 것이거든요. 우리 소리와 춤, 울림도 모두 그것인데요. 브라질 상파울루 한인성당 공연 때 수녀님이 세례명이 뭐냐고 물어보시길래 세례도 안 받았는데 얼결에 ‘베드로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일로 항상 죄스러웠죠. 그런데 이번에 교리공부를 하면서 세례명을 바오로로 결정했습니다.

▶ 가톨릭에 입교한 직접적 계기가 있었나요.

직접적인 계기는 역시 아내입니다. 아내와 함께 새벽 미사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교리공부를 하게 됐는데요. 인간으로서 여러 가지 부족함을 느낄 때 아내가 저를 잘 인도한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가정의 큰 화목과 우리 가족이 함께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컸던 것 같고요. 가톨릭으로 인도한 아내에게 늘 감사하죠.

▶ 부인은 유명한 승무전수자이신데요. 예술인의 길을 함께 가시고 신앙도 같은데 어떤 점이 좋으세요.

아내는 재일교포 2세인데요. 미사 할 때나 기도할 때 아내와 똑같이 축복을 느끼는 것이 행복입니다.


의견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성당을 나가면서 시작된 것 같은데요. 똑같은 장구와 북을 치고 승무를 추더라도 그 의미가 진실하게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저희가 함께 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저는 큰 영광이라고도 생각하고요. 그런 일은 전에는 없었던 일들입니다.

▶ 바오로를 세례명으로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이방인의 사도로서 굉장히 탄압을 많이 받으셨던 분이더라고요. 로마시민으로요.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모든 영광이 장구와 꽹과리를 친 우리 민족의 신명인데요. 이 신명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자 하는 그런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세례명을 바오로로 정했습니다.

▶ 사물놀이로 전교 여행을 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오래전부터 간직한 꿈인데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꼭 하고 싶습니다. 베드로 대성당의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과 우리의 울림과 신명이 하나가 되고 모든 종교가 화합하는 그런 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 평상시 마음에 담고 있는 성경 구절이 있으신가요.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르 14,26)는 구절을 볼 때마다 아, 이게 나의 역할이고 나의 모습이구나 하고 느끼고요. “춤을 추며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 북치고 수금 타며 노래하여라”(시편 149)는 말씀을 읽고


기쁨과 희망, 평화를 함께 나누는 현장에서 (사물놀이가) 하느님께 제게 주신 큰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합니다.

▶ 사물놀이를 창시하신 분인데요. 사물놀이는 무엇인가요.

1978년 2월에 사물놀이라는 용어로 처음 연주를 했으니까, 한 40년 정도 됐는데요. 사물은 꽹과리, 징, 장구, 북 네 가지 악기라는 뜻인데요. 마을 단위로 일할 때도 치고 초상이 났을 때도 치고, 잔치 때도 쳤습니다.


전쟁이 나면 이게 군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활 속에 없으면 안 되는 가장 필수의 기본 악기였죠.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한 경제논리가 앞서면서 가장 중요한 우리들의 신명, 우리의 맛과 멋이 생활 속에서 떠나 버린 겁니다.


우리 세대가 크게 반성해야 할 일인데요.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지켜왔고 우리 조상, 우리 아버님들이 물려주신 것인데 현장에서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래서 우리 세대가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사물놀이입니다.

▶ 사물놀이와 남사당패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겁니까.

남사당패는 전문 예인 집단으로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입니다. 저는 남사당의 후예인데요. 남사당패는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전국을 유랑하면서 직업으로 삼았던 분들입니다.


악기도 연주하고, 서커스도 하고, 춤도 추고 인형극도 하고요. 가장 원초적인 것부터 공연했던 프로 집단입니다. 남사당패였던 아버님은 대를 이으시려고 아들 낳기만을 기다렸죠.

▶ 다섯 살 때 상쇠의 목말을 타고 춤추고 재주 부리는 무동(舞童)으로 데뷔하셨는데 무섭지 않으셨어요.

가장 꼭대기에 올라가는 아이를 ‘새미’라고 하는데요. 아기 때는 그게 마냥 좋았습니다. 높은 데에서 어른들의 환호와 탄성을 내려다보는 게 좋았고요.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인데 먹을 것도 풍성히 챙겨주고 최고 대우를 받았죠. 제가 어디 아프면 안 되니까 제일 좋은 것은 저부터 챙겨주시고요.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 최근에 아주 귀한 자료가 공개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모습을 보고 싶었고요, 더 중요다한 것은 우리 아버님 세대의 공연이 예술적, 음악적, 역사적, 학술적으로 의미가 매우 큰데 그동안 영상 자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제자가 전주에 있는 ‘국립무형유산원이라는 곳에서 찾아냈습니다. 제가 7살 때인 1959년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꽹과리 치며 공연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아버님도 계시고요. 16밀리 흑백 필름인데요.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저에게는 정말 국보급 영상 자료입니다.

▶ 1980년대에 사물놀이 하면 데모 앞잡이로 오인되지 않으셨나요?

70년대 중반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거셌고 그 당시 아픔을 풀어주는 데 사실 꽹과리, 징, 장구, 북만한 게 없었죠.


폭발적이었으니까요. 탈춤판이 벌어지든 시위 현장이 됐든 항상 사물놀이가 선두에 섰죠. 기쁠 때는 기쁨의 음악이고 화가 나면 민중의 힘이 되고 잔치 때는 잔치 음악이 되는 게 바로 사물놀이입니다.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신명이고 울림입니다. 70년대 말에 사물놀이가 탄생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냥 역할자로서 행위를 한 것뿐이죠.

▶ 요즘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로 시끄러운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기 마음에 들면 예술이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블랙리스트 만들어서 탄압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있었다고 해도 21세기를 사는 글로벌화 된 시대에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얘기죠. 헌법에도 맞지 않고요.


예술가는 언제나 진보적인 사고를 하고 시대 정신에 근거해 창조 예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리스트를 만들어 일종의 검열을 하겠다는 것은 충격적이죠.

▶ 4개의 전통 타악기가 내는 둔탁한 소리가 어떻게 음악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요?

제가 50년 이상을 외국 다니면서 각국의 좋은 음악과 기 싸움도 해보고 조화로운 앙상블도 해봤는데요. 우리 소리는 정말 신비롭습니다. 우리 전통 가락이 수백 가지의 리듬 꼴이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 해외 공연을 많이 하셨는데 어떤 공연이 가장 인상에 남으세요.

우리 꽹과리, 징, 장구, 북이 공식적으로 세계 음악계에 등단한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2년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서 월드 세계 타악기인 대회였는데요. 3500명 이상의 세계 최고 연주자들이 모인 곳에서 우리 사물이 세계 음악계에 울림을 준 그 날은 아마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판문점을 통해서 평양에 공연하러 갔는데 어디를 가도 꽹과리, 징, 장구, 북이 있는 거예요. 북한에도 똑같은 울림과 똑같은 신명이 있었습니다.


북한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도 하고 행진도 했는데요. 남북이 평화통일을 구현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저는 꽹과리, 징, 장구, 북만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 사물놀이는 이제 세계인의 음악 장르가 됐죠.

그럼요. 오래됐어요. 우리가 서양 선교사님들에게 서양 문화와 서양의 악기를 배운게 한 150년도 안 됐어요. 이제는 거꾸로 정말 우리 것이 좋다면 우리도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학계나 세계의 많은 지도자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의 마지막 꿈이자 소명이라고 하면 공식적인 학교 음악교실에 이 악기를 가져다 놓고 교육하는 것입니다.

▶ 전통예술의 창조적 계승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신가요.

전통을 계승할 때 절대적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대의 변화상도 담아야 하고 창조적으로 변화해 가면서 우리의 삶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본질, 기운, 맛까지 변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재료를 넣어서 된장찌개를 끊여도 된장 맛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죠.

▶ 오리지널 광대이신데 예술인을 꿈꾸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주시죠?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도피성이 강하지 않나 싶습니다. 부모님들도 문제가 있어요. 왜 세계 최고만 꿈꾸느냐는 것이죠. 카네기홀이나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것만 예술이고 연주인가요. 시장에서도 할 수 있고요. 자부심 느끼고 예술행위를 했으면 합니다.

▶ 새내기 신자로서 요즘 어떤 기도를 바치시나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그레고리오 성가를 듣습니다. 세례받기 전부터 그랬는데요. 아침에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면 저의 정신과 마음에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가를 들으면서 교만하지 않고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