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리내 교우촌의 유래와 성지
가. 미리내 교우촌의 유래
미리내 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時宮山 515m, 神仙峰으로도 전해짐)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이고, 그것이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우리말 ‘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우리의 옛 지명이다.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양평(양근), 용인, 안성, 화성, 시흥 일대와, 충청도 천안 목천, 진천 배티, 동골 등, 교회 초기에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 중에서, 중부내륙 용인과 안성에 깊숙이 위치한 초기 비밀교회인 미리내, 한덕골, 골배마실, 굴암, 검은정이 중 한 곳이었다.
미리내와 인근의 이십리 안에 있는 한덕골, 골배마실, 검은정이 등의 교우촌들은 본래 신유박해(1801년) 이후에 크고 작은 박해를 거치면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산속을 찾아들어와 미리내 인근 산골짜기로 옮겨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훗날 미리내는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이곳 골짜기 마다 작은 마을들을 이루며 주로 척박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기록상으로는 1827년 정해박해 때에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 되어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일찍이 일가를 이끌고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살았던 곳이 용인 교우촌 이었으며,
또한 여섯 살 소년 김대건이 1827년에 할아버지 김택현, 아버지 김제준을 따라 충청도 당진 솔뫼에서 박해를 피해 들어온 곳이 한덕골(묵리 한덕동 광파리골) 교우촌이다. 김대건 신부 묘역이 있는 미리내 고개 너머에 바로 인접한 골짜기 교우촌이다.
최양업 신부의 둘째 큰아버지 최영겸 베드로 일가가 1837년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와 정착해 살던 곳도 미리내 언덕너머 ‘한덕골’로서, 기해박해로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하자, 최양업의 막내 어린동생 최신정이 최양업 신부가 귀국할 때까지 성장했던 곳이다.
또한, 1839년경 풍양 조씨 일가도 박해를 피해 미리내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전해진다.
미리내 교우촌은 주로 충청도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로 형성되었는데, 훗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옮겨온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 1829~1921)의 집안도 조부 때에 이미 이곳 미리내로 이주해 와 정착하였다.
이처럼 미리내 인근은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굳건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1846년 10월 30일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미리내는 선교사들이 피신하여 우리말과 풍습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1863년 가을에는 칼래(N. 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가 이곳에 머물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서한을 작성한 사실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교우촌 신자들이 피신함으로써 미리내 교우촌은 일시 폐허가 되었다가, 박해가 끝난 뒤에 다시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교세가 증가하게 되었다.
나. 미리내 성지
미리내 성지(안성시 양성면 미산리)는,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소와,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 그리고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이 있는 거룩한 성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묘역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高주교, 미리내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29년까지 33년간 본당을 지킨 초대주임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세 번째 방인사제 중 한 분) 신부와, 간도지방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미리내 본당 3대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묘소가 함께하고 있다.
묘역 왼쪽 윗 편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의 묘소,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만25세의 나이로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한 점 흠결 없이 순교하였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파수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교우촌 어른들의 걱정과 격려를 받은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 시킬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 묘역을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이민식은 그로부터 7년 후,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하자,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주교의 유언을 따른 교회의 결정으로 그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묘소의 옆자리에 안장하였다.
아들이 치명한 지 18년이 지난 1864년 5월17일,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 1984년 성인위에 오름)와 대역죄인 아들신부를 천주께 보내고, 이집 저집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실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 어머니도 김대건 신부의 묘소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모자간의 한을 위로하였다.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빈첸시오 자신도 92세에 세상을 뜨니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묘역 곁에 묻히게 되었다.
1883년에 <순교자 79위 시복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서울교구의 뮈텔(Mutel, 閔德孝)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고 미리내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당시의 교우촌 신자 수는 모두 82명이었다.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5월, 강도영(姜道永) 신부의 부임으로 미리내에 본당이 설정됐을 때에, 이곳에는 이미 182명의 신자들이 한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고, 1906년 <미리내 요셉성당> 축성 때에는 교우 수가 1,600명을 넘었으며, 1922년에는 본당관할 12개 공소의 공소 신자가 1,453명에 이르렀다.
원삼면의 고추골, 용바위, 모래실. 내사면의 은이, 골배마실, 수여면의 별미. 미동면의 먹뱅이, 한터울, 안터, 사리틔, 쇠재. 남사면의 사미로니 등 12곳 공소들로서, 미리내 인근 30리 이내의 이들 교우촌들이, 옛 선조들의 신앙을 지키며 꿋꿋이 믿음살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 묘역 위 미리내 고개(오두재, 일명 애덕고개)를 넘어서면, 거문정이, 굴암골, 한덕골, 먹뱅이, 은이, 골배마실 골짜기에 이르는데, <용담 저수지> 옆 ‘묵리 먹뱅이’가 미리내 성지에서 5.5Km거리이고, 한덕골(광파리골)이 4Km, 거문정이, 굴암골이 2Km 이내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미리내에서 오두재(애덕고개) 해실이(망덕고개) 어은이고개(신덕고개)를 넘어가면 은이공소(미리내 성지에서 9Km)에 이른다. 은이공소와 골배마실은 작은 산을 사이에 두고 넘나들던 지척 간(1.5Km)이다.
다. 미리내 성지의 성역화와 성지순례
미리내의 성역화 작업은 지난 1972년부터 시작되었다.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 편에는, 초대 주임 강도영 마르코 신부와 본당신자들에 의해 1906년에 건립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과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신자들 자녀에게 천주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던 미리내 교우촌의 <해성학원 교사> 건물이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
이곳 요셉 성당과 해성학원은 교우촌 선조들의 땀과 나눔과 섬김의 전설을 침묵 속에 담아서 100년 세월을 지켜온 옛 이야기를 오늘에 전해준다. 성당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 하악골(아래 턱 뼈)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요셉성당의 제대는, 일제시대 때 원산 <덕원수도원>에서 제작되어 우마차에 실어 미리내까지 운반해 왔으며, 제2차 바티간 공의회 이후에도 제대와 감실만을 분리하여 현재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종각에 올려진 <미리내 종>은, 1917년 강도영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로부터 들여 왔으며, 일제시대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 포탄제작을 위한 징발을 당해 하마터면 훼손될 뻔하였다.
이 종은 현재도 미리내 본당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요셉성당 옆에 있는 깊은 우물은, 강도영신부와 본당 신자들이 목을 축이던 유서 깊은 우물이다.
미리내 성당 윗 편으로는 16위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또한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가 진토로 남아있어, 순례자들의 기도와 묵상 속에 참배가 이어지고 있다. 묘역의 아래 언덕에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성지 입구에서 묵주 기도처를 따라 성지를 오르다보면, 성지 중앙에 1991년 봉헌된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 있고 <성모당>이 있다.
시성 기념성당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 <종아리뼈>가 안치되어 있으며,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형구와 순교 참상의 모형물들이 있어 그날의 교난을 오늘에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성지의 제일 위, 미리내 언덕에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추어, <한국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1928년 9월 ‘순교자의 모후경당’ 으로 봉헌 되었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역을 찾는 순례자들은 묘역에 참배하고, 기념경당에서 성인의 <유해 친구>와 묵상과 기도로 순교영성에 깊이 잠기게 된다.
기념경당 내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발 뼈>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분>을 안치하고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가톨릭 대학교(성신 교정)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미리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옛 무덤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 무덤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들이 지닌 아름다운 신앙의 넋이 깊이 스며 배어진 진토(塵土)로서 빛나는 순교영성의 향기가 가득히 머문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스승과 동료 신부에게 보낸 옥중 서한에서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님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히 (이를)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여! 잘 있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믿음, 겸손, 사랑, 순명으로 <십자가의 비결>을 살아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이윤일 요한 성인, 16인 무명 순교자들이 꽃피운 순교의 영성을 묵상하면서, 이곳 미리내를 찾는 순례자들은 오늘 우리들 각자의 신앙생활을 깊이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이웃에 실천하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내일의 구원을 준비하는 순례여정이 되도록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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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리내 성지의 순교자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니’
순교 영성이 흙으로 깃 든 미리내 성지의 진토(塵土)
가.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 안치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이곳 미리내 교우촌 신자들의 손길로 가꾸어져 오다가, 초대 본당신부가 부임한 후 미사를 올리며 정성껏 묘역을 돌보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886년에는 교황청 시복 판사인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고, 1901년 5월 에는 순교자의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신학교 성당의 유해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9월 경남 밀양 성당으로 잠시 옮겨져 안치되었고, 1951년에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로, 1960년 7월 5일 혜화동 가톨릭대학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리내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과 발뼈 및 관조각의 일부가 보존되어 오다가, 한국순교복자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안치되어, 성지 순례자들에게 참배 현양과 친구의 큰 선물을 안기고 있다.
또한 미리내 성지에는 병인박해의 순교자 <이윤일 요한 성인>과 미리내 인근 교우촌 부근에 매장되어 방치되어 오던 16인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도 1976년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나.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와 16위 무명 순교자 묘역
미리내 성지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은 <이윤일 요한 성인 묘소 유지(遺址)>를 중심으로 하여, 좌로 12위, 우로 4위를 하나의 큰 봉분으로 조성해 모시고 있다.
묘역에는 <무명순교자 비>와 <무명 순교자 묘역 안내>비문, 그리고 <성인 요한 이윤일 천묘 사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순교자 묘역 아래에는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이 조성 되어있다.
+ <무명 순교자 비> 비문
오! 위대하신 주님의 용사들이여!
영원한 삶의 길인 진리를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전하시다가
당신들의 소중한 성명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치신
그 숭고한 정신을
저희들은 정성을 다하여 영원히 영원히 빛내리이다
+ 무명 순교자 묘역 안내문
이 묘역에는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이름조차 숨긴 채 순교하신 16위의 무명 순교자들이 모셔졌다.
1976년 수원교구의 순교자 현양사업으로,
좌로 12기는 4월 23일 용인군 내사면 대대4리 음다라니 산기슭,
소위 목 없는 줄 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에서,
중앙의 1기는 6월24일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 산상에서,
우로 4기는 12월 17일 용인군 수지면 신봉2리
시봉부락 밭 기슭 돌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에서 옮겨 모셨다.
중앙의 1기 묘는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21일 순교 장소인 대구 관덕정으로 모셨다.
+ <성인 요한 이윤일 천묘 사적비> 비문
성인 이윤일께서는 1812년 충청도 홍주 땅에서 태어나셨다.
성장 하신 후, 천주신앙 봉행으로 말미암아 여러 곳으로 옮겨 사시다가
경상도 문경새재 근처의 산간마을인 여호목에 정착하시었다.
일가와 더불어 천주의 가르침대로 사시다가
병인박해가 크게 벌어지던 1866년 11월18일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시었고,
문경 상주 등지에서 고난을 겪으신 후,
마침내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 광장에서 순교하시었다.
그의 시신은 그곳 교우들에 의해 수습되어 형장부근에 가매장 되었다가
그 후 박해가 다소 누그러지자 후손들에 의해 대구 날뫼(비산동) 야산에 안장 되셨다.
1904년경에 이르러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 먹방이 마을에 은거하던 후손이
그 무덤을 대구로부터 먹방이 뒷산으로 옮겼다.
1976년 수원교구가 순교자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교구 내 각지에 흩어져있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유서 깊은 미리내 성지에 조영할 때
성인께서도 그 해 6월 24일 먹방이 뒷산으로부터 이곳 미리내 성지로 이장되시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이 근래에 밝혀지자
성인을 특별히 현양하고자 하는 대구 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의 원의를
수원교구 김남수 주교가 받아들이게 되어 성인이 혈체를 봉헌하신 대구 관덕정 옛터로 성 인을 모셔가기 위하여 1986년 12월 21일에 대구 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와 사제 평신도 다수가 함께 장엄한 행렬을 이루는 가운데 성인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제 이 사실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뜻을 모아 이곳에 천묘사적비를 세우는 바이다.
1988년 9월 20일 한국 103위 순교자 대축일에 글 지은이 : 이원순(에우세비오)교수 세운이 : 이문희(바오로) 대주교 |
†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무덤
이윤일 요한 성인은 죽어서 이곳 미리내 성지에 살을 묻어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과 아름다운 만남을 이룬 분이다.
박해를 피해서 예수님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머문 곳, 그곳이 그의 고향이었고, 그래서 경기 충청 경상도가 고향이 되어버린 분, 우리 순교역사의 빛나는 증인이요 믿음살이의 모범이시다.
본래 충청도 홍주 출신인 그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 문경 여우목 골짜기에 은거해 살던 중 체포되어 1866년 12월 대구 관덕정(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급히 대구시 비산동 날뫼에 매장되었으며, 훗날 먹방이(용인 이동면 묵리)로, 1976년에 미리내로, 1986년에는 다시 대구 관덕정으로 이장되었다.
먹방이 무덤은 '거꾸로 된 무덤'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이유는 성인의 가족들이 훗날 그 시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거꾸로 묻었기 때문이다. 그 후 실전이 된 이 무덤은 1970년대 초에 먹방이 인근에 살던 한 신학생의 여름방학 과제물에 <자기 고향마을에 거꾸로 묻힌 순교자의 무덤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 가톨릭대 최석우 신부(現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몬시뇰)에게 전하게 되었다.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 출신인, 최재용 발도로메오 신부(1971년 7월 서품)의 친 조모인 <주 마리아> 할머니와 ‘이윤일 순교자 묘’에 관한 증언이 있는 <용인천주교회사>게재 내용을 고려해 볼 때에, 1970년경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이 서울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시절, 여름방학 과제물로 내놓은 숙제를, 당시 최재용 신학생이 리포트를 작성 최석우 신부에게 제출 하면서, 소위 <거꾸로 묻힌 먹뱅이 치명자의 묘>가 교계에 알려지고, 1980년대에 와서 ‘이윤일 성인의 묘’로 우리 교회에 밝혀지게 되는 첫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윤일 성인은,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라. 그리고 훗날 내 뒤를 따르라.” 는 말을 남기고 치명하였다.
치명 37년 만인 1904년에, 그 후손이 성인의 유해를 대구에서 용인 먹뱅이 교우촌으로 왜 옮겨왔는지? 그리고, 먹뱅이로 이장한 후 어찌하여 그 후손은 영 영 사라져 버리고, 1970년 ‘최석우 신부의 치명자 묘소 발견’ - 1976년 ‘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이장’에 이르기 까지 순교자의 이름마저도 잊혀져서, 소위 <거꾸로 묻힌 치명자의 무덤>으로만 교우촌 신자들에 전해지게 되었는지 그간의 사연들을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이윤일 요한 순교자의 무덤은, 묵리 먹뱅이 뒤 신방골 산에 ‘거꾸로 묻힌 치명자의 무덤’으로 묵리 먹뱅이 교우들에 의해 보호되어 오던 중, 1976년 6월 용인본당 장덕호 신부에 의하여 <미리내 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는데, 그때 순교자의 유골은 이미 하얀 흙이 되어 큰 뼈의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윤일 요한 성인이 묻혀있었던 용인 묵리는, 미리내 성지 김대건 성인 무덤이 있는 <79위 기념경당>에서 옛 산길로 가자면, 경당 윗길 ‘오두재 고개’를 넘어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십오리 정도 거리의 마을인데, 한덕동 광파리골, 성애골, 검은쟁이(거문정), 먹뱅이, 병목골 등등 잊혀진 교우촌들이 골짜기마다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용인시에서 45번 국도로 안성방면으로 오다가 천리 사거리가 나오고, 천리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천리 요셉성당' ‘용덕저수지’ ‘신원 월드컨트리 클럽’ ‘한덕골’이 나오고, 묵리 <용덕저수지> 인근에 <천주교 순교자 이윤일 성인의 묘> 묘지 안내표석이 있고, 표석에서 400m를 오르면 1986년 대구대교구에서 성인의 묘소가 있던 곳에 세운 <요한 이윤일 성인 유지비(遺址碑)>가 있다.
† 목 없는 치명자의 줄무덤
‘목 없는 치명자 12기 무덤’이 있던 용인 내사면 대대4리(양지IC. 서북방 1.5km)는 용인 양지면 대대리 한터마을 - 일명 ‘무량골 응달말’(음다라니, 응달안)이라는 곳이다.
‘무량골 사기점’은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교난을 피해 숨어살던 교우촌 산골 마을로 ‘치명일기 851호 치명자’ 이희서(49세)는 이곳 한터 사기점에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에 죽산 포졸에 붙잡혀 1866년12월7일 당시 현청과 도호부사가 있던 죽산 감옥에서 치명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병인박해 당시 죽산 감옥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모두 24명 내외라고 하나, 이 중 용인 이동면 묵리 병목골 사는 김 도밍고(치명일기137)와 용인출신 정 도마, 정 야고보, 방 데레사, 금 데레사, 그리고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함께 124위 시복 시성 심사에 올라있는 박 프란치스코(충청도 33세), 오 마르가리타(여, 출생지, 나이 불명)만이 이름과 본명이 전하여 질뿐 나머지 분들은 순교자들의 이름이 없다.
또한 이들 중 네 분의 치명자들도 출신지가 용인 어느 곳인지가 불명인 것이다.
한터 사기장(사기점) 교우촌은 현재 지도상에도 대대리 ‘사기장’ 지명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이웃 동리인 ‘응달말’(한터 초등학교 서북편1.2Km) 소위 ‘목없는 12기 치명자 무덤’이 있던 곳은, 바로 이 대대리 마을이 박해의 와중에서 몸부림치던 눈물의 교우촌 이였으며, 그들이 살던 고향, 이름, 그들 삶의 사연들이 어떠했었는지를 침묵으로만 말해줄 뿐이다.
† 수지 시봉부락 지붕골의 돌무덤
.1976년 수원교구의 순교자 현양사업으로 이장된 무명순교자 4위는 그 해 12월 17일 용인군 수지면 신봉2리 지붕골 시봉부락 밭 기슭 ‘치명자의 돌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에서 옮겨져 왔다.
수지 <신봉리 시봉부락>은 분당 죽전동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바라보며 맞은편에 자리한 동리가 수지구 신봉동이며 그 북쪽의 해발265M <성지바위 고개-성지바위산>을 넘어가면 ‘손골‘ 동리인데 동천리(수지구 동천동) 중손골이다.
이곳 수지의 동천리 손골과 이웃한 신봉리 교우촌은, 옛 박해 때부터 ‘달레 천주교회사’에서도 언급된 유명한 곳이다. 동천리, 신봉리 서북방 30리 지점 - 서울외곽순환국도(100번) 청계터널 근방에는 <하후현 성당>, <서 루도비꼬 신부의 유적지>가 있고, 판교 신도시가 연하여 있다.
신봉리 시봉부락과 손골 교우촌에서 동쪽인 ‘죽전동’ 우측으로 재를 넘어 30여리 인근이, 유명한 모현면 오산리 사기막골 교우촌이다.(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지 근처)
이렇듯 신봉리 교우촌 <시봉부락> 산기슭 밭두렁에 돌무덤으로 남아 있던 네 분의 무명순교자 묘역을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교우촌이 골짜기 마다 산재해 있었다.
3. 미리내 본당의 약사(略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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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사이에 경기 충청 지방의 교우들이 교난을 피해 미리내와 인근의 한덕골(寒德洞,
* 이동면 묵리), 은이(隱里. 내사면, 숨은 이들의 마을), 골배마실(내사면 남곡리) 등지의 산속에 숨어들어 교우촌을
* 이루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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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9.16 한강 새남터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846년 10.30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시신을 미리내에 안장
1846년 10.30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 이민식 빈첸시오 청년과 몇 몇 신자들이 10월26일 새남터 백사장에서 찾아내어 청년
1846년 10.30 의 선산이 있는 이곳 미리내로 옮겨와 10월 30일에 안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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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12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 페레올(요한·고) 주교 시신을 미리내에 안장
1857년 9.23 순교자 김대건 신부를 가경자로 선언
1863년 가을. 칼레(N.A. Calais, 강 니콜라오) 신부가 미리내에 머물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1863년 신학교 교장신부에게 보내는 서한을 작성함.
1864년 5.17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 시신을 미리내에 안장
1865년 오메트르 신부가 미리내에서 신자들과 성모성월행사를 집전한 것으로 전해짐
1866년 미리내 인근이 병인박해 전후로 오메트르, 깔레 신부의 임시 은신처로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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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까지 교우촌을 이루며 깔레 신부가 거처한 것으로 추정되며, 병인박해 이후에
※ 교난을 피해서 교우촌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얼마간 은 폐허화 되었다가 박해가 끝난 후 다시 돌아와
※ 교우촌이 재건되고 교세가 증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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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서울교구 경리와 순교자 시복조사를 맏고 있던 뮈텔(Mutel, 민덕효) 신부가 미리내를 방문. 미리내 공소
1883년 를 설립함(신자 수 82명)
1888년 7월 갓등이 공소(수원 봉담면 왕림본당)가 한수 이남에 경기도 최초의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미리내 공소가 왕림
1888년 7월 본당 관할 공소로 편입됨.
1895년 10.17 가을 판공에 왕림본당 주임 알릭스 신부(2,4대)의 발병으로 서울에서 빌렘 신부가 미리내 공소 강당에 임시
1895년 10.17 주재하여 성사를 줌(신자 112명).
1896년 3월 빌렘(Joseph Wilhelm, 홍석구) 신부는 상경 후 황해도 안악 본당으로 부임.
1896년 3월 *1897년 1월11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골 에서 안중근(토마스)에게 세례를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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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4.26 제8대 교구장 뮈텔(Mutel, 민덕효) 주교에 의해 <미리내 본당>으로 승격됨.
1896년 5.20 세 번째 방인사제로 4.26 서품을 받은 강도영 마르코(1863-1929)신부가 초대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함
1896년 5.20 신자 -미리내 본당 182명 / 공소30~40개소, 공소신자 1,779명으로 광주, 죽산, 양지, 양성, 용인, 이천군 산하의
1896년 5.20 공소들을 관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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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5.21 김대건 신부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짐. (시복 조사)
1901년 5.21 [김대건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 뼈)을 본당에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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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9월 <성 요셉 미리내 성당> 건립 봉헌식 거행 - 뮈텔 민 주교 집전
1906년 9월 건립기간 :1 904~1906년, 부지 410평 건평 80평, 인근의 자연석과 목재와 백회로 축조. 본당 교우 수 1,600여명
1907년 해성학원(교리 및 초등부 과정)설립 - 교사 신축, 사제관, 해성제사공장(양잠과 농업기술 교육) 건립.
1913년 5월 미리내 본당에서 용인 압고지 본당(전대리) 분당
1911년 성당을 현재의 모습으로 개보수함
1921년 4.26 강도영신부 사제서품 은경축 미사 봉헌. (신부 18명, 신자 3천명 참석)
1921년 12.9 이민식 빈첸시오 선종(92세), 김대건 신부 옆에 안장
1822년 신자 수 : 본당구역- 365명, 공소 12개소- 1,453명 총계 1,81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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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5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를 복자품으로 시복(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1927년 9.14 미리내 본당에서 남곡리 본당 분당(현 양지 성당)
1928년 9.18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경당 건립 봉헌식(라리보 보좌주교 집전)
1928년 9.18 ‘치명자의 모후 경당’으로 봉헌
1928년 9.1※ 경당(經堂) : 특정 신자나 공동체를 위한 경배, 기도, 예배처, 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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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3.12 초대 주임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선종(67세), 김대건 신부 옆에 안장
1929년 4월 2대 본당 주임 뤼카 신부 부임
1932년 9월 3대 본당 주임 최문식 베드로 신부 부임
1932년 9월 <만주 북간도 팔도구 조양하(朝陽河)성당에 최초의 방인사제로 간도동포
1932년 9월 사목 중, 마적단에 납치 되어 극심한 수난을 겪고 극적으로 생환됨>
1936년 혜성학교가 일제탄압과 재정난으로 폐교됨
1949년 11.15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로 결정됨
1952년 10.11 최문식 베드로 신부 선종 (페레올 주교 무덤 옆에 안장)
1952년 10.11 미리내 본당이 양지본당 관할공소로 편입됨
1955년 4월 4대 본당 주임 신종호 요셉 신부 부임
1959년 5월 5대 본당 주임 윤형중 마태오 신부 부임
1960년 6대 본당 주임 김덕명 신부 부임
1962년 7대 본당 주임 김철규 바르나바 신부 부임
1963년 8대 본당 주임 김창문 요셉 신부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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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7 수원교구 설정으로 서울 대교구에서 수원교구로 편입
1964년 안성본당 (현 대천동 본당) 공소로 편입
1965년 9월 복자성월에 경당 앞 광장에서 순교자 현양행사를 거행(이후 매년계속)
1965년 9월 기념경당 부근 공동묘지 이장 및 경당 앞 광장 조성
1970년 성지 진입도로 확장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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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본격적인 미리내 성지 성역화 사업 시작
1974년 김대건 신부 기념 시비(詩碑) 건립
1976년 제9대 본당 주임으로 정행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부임
1979년 성지 진입 도로 확장 및 포장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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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26 김대건 신부 <순교 130주년> 기념행사 거행
1980년 10.12 준 본당으로 승격
1980년 옥외 ‘십자가의 길 15처 성상‘ 봉헌식 (김남수 안젤로 주교 집전)
1982년 성지 구역 내의 주민들을 인근 새마을 단지 조성하여 이주시킴
1982년 4.8 겟세마니 동산 봉헌식
1984년 5.6 성인품으로 시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품에 오름)
1991년 5.27 한국천주교 103위 시성 기념 대성전 건립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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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제10대 본당 주임으로 이관대 스테파노 신부 부임
2001년 11월 제11대 본당 주임으로 이풍우 라이문도 신부 부임
2002년 9월 제12대 본당 주임으로 박해식 리보리오 신부 부임
2004년 10월 제13대 본당 주임으로 강정근 마티아 신부 부임
2005년 10월 제14대 본당 주임으로 김형중 그레고리오 신부 부임
2005년 10월 25일 제 15대 본당 주임 겸 성지 전담으로 강정근 마티아 신부 부임
2009년 9월 1일 제 16대 본당 주임 겸 성지 전담으로 안병선 요한사도 신부 부임
2009년 9월 1일 이건희 안드레아 보좌신부 부임
2010년 8월 31일 설동주 안드레아 보좌신부 부임
2011년 9월 1일 심용일 비오 보좌신부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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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관련 자료 / <수원교구 30년사 - 천주교 미리내 성당> <용인 천주교회사>
함평이씨 종친회 대표카페(hammlee family representative cafe)
cafe.daum.net/ham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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