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Nisibis) 태생인 성 에프라임(또는 에프렘)은 어느 이방인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양친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됨에 따라 18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니시비스의 성 야고보(Jacobus, 7월 15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후일 이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325년의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성 야고보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시리아의 문헌에 의하면 350년의 페르시아 침입 때 그의 기도 덕분으로 니시비스가 해방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나, 363년에 요비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니시비스가 재차 페르시아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는 로마 땅인 에데사 근교의 동굴에 거처를 정하고는 신자들에게 설교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제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그의 저서 대부분을 저술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370년에 카이사레아(Caesarea)로 가서 성 바실리우스(Basilius)를 찾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372년과 373년 겨울의 냉혹한 기근을 덜어주는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그는 에데사에서 운명하였다.
성 에프라임은 성서적 근원을 밝히는 비중 큰 저서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교의 및 수덕 생활에 관한 수많은 글을 시리아어로 남겼다. 또한 그는 이단을 반박하는, 특히 아리우스(Arius) 이단과 영지주의를 공격하는 중요한 논리를 서술하였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그는 복되신 동정녀에 대하여도 신심이 깊었는데, 그가 마리아의 원죄 없음을 단언하였기 때문에 흔히 ‘원죄 없으신 잉태’의 증인으로도 불린다. 또한 그는 공식 예절에 찬미가를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 교육에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전례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업적은 일찍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그리고 라틴어로 번역되어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의 니시비아어 찬미가와 절기에 따른 찬가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하여 그는 ‘성령의 하프’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황이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한 것은 시리아 교회 출신으로 서방 교회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그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강론 : (마르 12,35-37)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5-37)”
이 말씀에 들어 있는 다윗의 말은 시편 110편 1절입니다.
‘주님께서’의 ‘주님’은 야훼 하느님입니다.
‘내 주님께’의 ‘주님’은 메시아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는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당신의 오른쪽 자리로 높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는
하느님께서 메시아께 온 세상의 통치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메시아는 인간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다윗이 ‘주님’이라고 불렀던 분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다윗 왕조만을 재건하시는 분이 아니다.
메시아는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다.”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기뻐합니다(마르 12,37).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말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로 바꿔야 합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을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런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 가운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온다고 해도,
또 그 메시아가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다고 해도,
다윗 왕조를 재건하기만 하는 메시아라면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별로 좋을 것이 없는 일입니다.
(다윗 왕실 후손들은 좋아하겠지만,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로마제국의 지배와 다윗 왕실의 지배가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좋아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라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을 똑같이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 즉 메시아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회개하여 어린이가 된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만 있는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낮추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라는 말이나 ‘낮은 사람’이라는 말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고, 모두가 다 낮은 사람입니다.
기득권층도 없고, 지배 계층도 없고, 소외 계층도 없습니다.
(지상에서의 기득권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기득권을 버려야 합니다.)
계급, 신분, 지위, 인종, 빈부, 남녀, 학력 등의 차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차별이 있다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그 나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3-5).”
그 나라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제도 교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제도 교회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의 모든 제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제가 되고, 똑같은 권한을 가진 똑같은 시민이 됩니다.
만일에 특정 계층(계급) 사람들이 우월적인 지위와 권한을 누리게 된다면,
우리가 그런 나라를 희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를 희망한다고 해서
지금의 인간 세상을 그냥 참고 견디기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또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즉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기도하는데,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6월 8일의 복음 말씀에 나왔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는 계명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으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신이 높아지기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높이면 됩니다.
그러면 모두가 높아질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하느님 나라는 어디 먼 곳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또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먼 미래의 나라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고, 우리가 노력해서 완성시켜야 할 나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들도 하느님 나라 건설과 완성을 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주임)
'강 론 말 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가톨릭평화신문- [정연정 신부] 6월 11일 가해 삼위일체 대축일 (0) | 2017.06.11 |
|---|---|
| 2017년 6월 10일 가해 연중 제9주간 토요일 (0) | 2017.06.10 |
| 2017년 6월 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0) | 2017.06.08 |
| 2017년 6월 7일 가해 연중 제9주간 수요일 (0) | 2017.06.07 |
| 2017년 6월 6일 가해 연중 제9주간 화요일(성 노르베트토 주교) (0) | 2017.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