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0,34-11,1)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버림과 따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분열의 원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분열과 갈등의 원인은 일치와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쪽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는데,
너희는 왜 내가 주는 평화는 받지 않고 칼을 선택하는가?”
라고 한탄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14-17).”
참으로 올바르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참 평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이고,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얻게 되는 참 평화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화는 ‘칼’로 이루어지는 평화이고,
겉으로만 아무 일이 없는, 몸만 편안한 거짓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칼’에 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이 말씀이 박해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시는 말씀이라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지키려고 칼을 뽑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지난 역사를 보면 잘못한 일이 많습니다.
종교와 신앙은 칼이 아니라 믿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안 믿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 그리고 인내로써 박해를 극복해야 합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5-3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리 떼’가 식구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경우에도 “슬기롭고 순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맞서 싸울 수는 없고,
신앙생활의 모범을 통해서 감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미움으로는 감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의 경우,
그는 헤로디아가 데리고 온 딸을 사랑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그 사랑도 사랑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빗나간 사랑, 즉 잘못된 사랑이었습니다.
딸이 살인을 요구할 때, 그 요구를 받아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참 사랑은 선을 지향하고, 선을 실현시킵니다.
따라서 정말로 딸을 사랑한다면 범죄를 막아야 합니다.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의 선’을 지향하지 않는 가족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식구들을 사랑한다면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을 가다보면 힘든 구간도 나오고 편안한 구간도 나오는데,
힘든 구간은 피하고 편안한 구간만 골라서 가려고 한다면
그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힘든 길은 피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저 세상에서의 일에만 이 말씀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권력과 재물을 탐하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들은 하루살이처럼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지혜로운 신앙인은 허망한 것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추구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신풍성당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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