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7월 15일 가해 연중 제14주간 토요일(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dariaofs 2017. 7. 15. 01:00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라는 이름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리텔라)의 아들로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라 한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는 1238년에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되어 영국의 유명한 헤일스의 알렉산데르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파리(Paris)로 갔으며, 그로부터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1248-1255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는데, 그의 강의는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생 아무르의 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어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생-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탁발 수도회가 파리에서 다시 부흥될 때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와 함께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비슷한 초창기에 성 보나벤투라는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피선되었고, 수도회의 내부 분쟁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였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극단주의 그룹을 단죄하였다.

 

1260년 나르본(Narbonne)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오랫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하였다.

 

그는 1265년 요크의 대주교좌를 거절하였고, 1271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의 선출을 적극 지지하였다.

 

1273년 그는 알바노(Albano)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로마(Roma)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Lyon)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7월 15일에 리옹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글을 썼고 또 남겼는데,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세 갈래 길”, “완덕 생활” 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하여 성서 주석, 약 5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하다.

 

그는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에 의해 시성되었고,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가 그의 상징이다.

 

강론   :     마태 10,24-33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마태 10,24) 
 

 


고독의 계곡에서 용기있게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참으로 보기에 좋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지으셨을 뿐 아니라 늘 함께 하시며 사랑을 나누려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천부적으로 외로운 존재가 아니지요. 그렇게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품고 사랑을 찾아 순례합니다.

 

정의이신 하느님을 품고, 진리와 공평과 평화를 위한 호흡을 이어가려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 스스로를 ‘고독의 방’에 가두기도 합니다. 망각의 병에 걸려 하느님을 잊고, 그분의 사랑을 거슬러 정의롭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행동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자신이 주인인양 착각하며 교만을 떨기도 합니다. 재물과 권력의 힘이 영원할 것처럼 믿고 착각하며 인생 갑질을 해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을 소외시키고 추해지는 것이지요.

한편 내 안에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친다 하여도 고독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랑 대신 무시와 천대를 만날 때 고독을 맛봅니다.

 

정의와 진리와 평화가 실현되기를 열망하지만, 구조악과 완고한 편견과 선입견에 막힐 때 우리는 고독을 느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길 거부하는 ‘악의 장벽’을 만날 때 우리는 깊은 외로움에 젖어들지요.

그런데 우리가 겪는 고독은 단순히 정서적인 고독이 아니라 성사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타락, 비인간화, 내 영혼의 깊은 어둠의 표상이며, 하느님의 고독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만큼 우리는 고독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그런 고독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실존적이며 영적인 도전이자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10,24-25)

 

이 말씀은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겪어낸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똑같이 걸으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저지르는 죄와 불의와 차별과 소외 때문에 주님을 고독하게 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길, 정의와 평화를 위한 고독한 여정에서 하느님의 고독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제자의 길이 행복할까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나의 고독 안에서 하느님의 고독을 발견할 수 있다면 분명 행복할 것입니다.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고독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행복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군중 속의 고독을 맛본다 하여도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10,28.31)

 

누군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나를 핍박하고 무시하고 죽이려 할 때, 우리는 두려워하며 고독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내 영혼은 주님의 영이 살아계시는 존엄한 성전이기에 고귀합니다.

 

육신의 죽음을 맞더라고 그 고귀함은 사라지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나의 영혼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애정 깊은 눈길로 바라보시며, “보니 참 좋구나!” 하시는 하느님 때문에 소중한 것이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소중히 여기시며 늘 함께 해주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도 고독의 어두운 계곡 저 밑바닥에서 고독을 사랑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꿔주시는 주님께 의탁하며, "지붕 위에서" 용기 있게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해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