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7월 26일 가해 연중 제16주간 수요일(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dariaofs 2017. 7. 26. 05:35

 

 

성모 마리아(Maria)의 부모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이외의 전승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70-18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Jacobi)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Apocrypha)으로 간주되지만, 마리아의 부모에 대해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실제 이 책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어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 한몫을 하였다.

 

물론 교회에서 위경으로 간주한 만큼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이 역사적으로 실제 벌어졌던 일들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야고보 원복음서”에 따르면, 성 요아킴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녀 안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여겨지기 때문에, 요아킴은 시무룩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로 하느님께 단식하며 기도드리기로 결심하고는 광야로 갔다. 그 동안 집에 홀로 남겨진 성녀 안나 또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 기도를 바쳤다.

이 부부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은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본 성 요아킴 역시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가 3세가 되었을 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양육받도록 맡겼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어머니 안나와 아버지 요아킴의 축일도 생겨났다. 그리고 많은 교부들이 “야고보 원복음서”를 즐겨 인용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조되었다.

 

원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축일은 9월 9일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전례가 6세기 동방 교회를 거쳐 8세기 이후에 로마로 도입되었고,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성당이 건축되었고, 중세 시대 유럽에 성녀 안나에게 봉헌되는 성당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성모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공경을 확산시켰다.

 

그 결과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가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 축일로 지정하였다.

이처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가정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모범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예전에는 대가족 제도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포함되지 않는 가정상이 낯설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마리아의 부모까지 포함시켜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교회 미술 작품에서 성녀 안나는 주로 영원하고 신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초록색 망토와 빨간 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며,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반면, 성 요아킴의 상징은 성전에서 행하던 그의 경건한 제사와 관련되어 어린 양, 백합, 새장 속의 비둘기 등이다.
 

강론   :   마태 13,1-9

                                               “열매는 백배가 되었다.”(마태 13,8)

 
                 

 


                                           ♣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

우리는 인생살이가 늘 기쁘고 행복하지만은 않음을 잘 압니다.

 

우리네 인생은 오늘 비유에 나오는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과도 같지요. 길가에 던져져 생명을 싹틔울 기회마저 갖지 못한 씨앗처럼 고독할 때도 있습니다.

 

돌밭에 던져진 씨앗처럼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 절망의 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인생은 가시덤불처럼 거칠고 혼란스럽고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희망입니다. 우리가 완전하거나 초능력을 지녀서가 아니라 절대희망이신 하느님의 손을 잡고 그분 안에 숨 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희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포기하는 것이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들며 고독한 순간에도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씨앗의 비유를 통하여 희망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이며,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와 목표임을 가르쳐주십니다.

 

메시아로 파견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지 3년 남짓 지나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제자들의 눈에조차 그런 예수님은 영락없는 실패자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이는 상황에서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기도 하지만, 좋은 땅에도 뿌려져 많은 수확을 낼 것이라는 것입니다(13,8).

 

그 어떤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를 살도록 불리운 하느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세상의 그 어떤 고통과 시련, 그리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독의 순간에도 희망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참된 시민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희망이요 생명이며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은 세상의 그 어떤 반대와 저항과 속임수에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지닙니다.

 

그저 생명력을 지니는 씨앗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고야 마는 인내의 씨앗이요 희망의 씨앗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희망의 씨앗인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에겐 절망이란 낯선 이방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인 우리는 과정 중에 절망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의 동아줄을 붙들고 사랑으로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면 내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꿈틀거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손을 잡으면 그분 친히 나의 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몸이 아플 때나 마음이 괴로울 때, 불의 앞에 무력감을 느낄 때나 거대한 자본과 권력의 횡포 앞에 의분을 느낄 때, 희망의 씨앗이신 주님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고, 그분의 심장에 기대어 내쉬는 한숨과 신음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보잘것없고 의미 없어 보이는 내 인생의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 속에서도 풍부한 열매를 맺어주시는 주님을 믿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오늘도 절망 가운데 희망의 꽃을 피워주시는 주님 말씀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씨를 뿌려 우리의 희망이 되어주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도 희망의 씨, 생명의 씨, 자비와 정의의 씨앗을 뿌려 가꾸는 ‘희망 농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