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야고보(Jacobus)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형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였다.
그들은 부친과 함께 겐네사렛 호수에 배를 띄워 고기잡이로 살던 사람들이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그들은 예수와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Andreas)의 집에 갔을 때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께서 낫게 해주신 현장에도 있었다(마르 1,29-31).
그들은 또 자기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태 20,20-28) 하고 청했던 사람들이다.
또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둘 다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얻었고(마르 3,17), 예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54)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에는 베드로(Petrus)와 그들 형제만 따라오게 하셨으며(마르 5,37),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 순간에도 베드로와 그들 형제만 함께 자리하게 하셨고(마태 17,1-8), 게세마니(Gethsemane)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러하셨다(마태 26,36-46).
성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 12,1-2).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에스파냐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지방으로 옮겨져 모셔졌고,
후일 이곳에 대 야고보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다.
(2코린 4.7-17. 마태 20.20-28)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질그릇과 잔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질그릇과 잔은 공통점이 있지요.
무엇을 담는 그릇, 용기라는 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잔이 마실 것을 담고 그릇은 음식을 담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와 예수님 모두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바꿉니다.
우리 인간이 또는 우리 마음이 무엇을 담는 존재라는 뜻으로.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담는 존재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자신 안에 무엇을 담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담는 좋은 그릇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을 담는 나쁜 그릇일 수도 있습니다.
성혈을 담는 성작이 될 수도 있고 술을 담는 술잔이 될 수 있으며
술잔이라도 축제 때 마시는 축배의 잔이 될 수도 있고
고통과 좌절의 때에 마시는 수난의 잔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럴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담는 사랑의 그릇과 욕심을 담는 욕심의 그릇 말입니다.
사랑의 그릇은 사랑을 원하여 사랑을 담습니다.
반면에 욕심의 그릇은 사랑보다 다른 것을 원하여 그것을 담거나
사랑을 원하더라도 사랑을 소유하려다 미움이나 악감정을 담으며
결국은 소유하려던 것도 죽고 자신도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어제는 걸으면서 길가에 핀 많은 꽃들을 보면 이생각저생각을 하였는데
제가 만일 사랑의 그릇이라면 꽃을 사랑하기에 꽃을 마음에 담지만
욕심의 그릇이라며 꽃을 탐내기에 꽃을 꺾어 화병에 담거나
꺾지 않더라도 화분에 담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보물을 담는 질그릇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런데 보물이란 무엇이고 질그릇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보물이란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은총이고
질그릇이란 그릇은 그릇이로되 보물을 담기에는 초라하고
무엇보다도 잃지 않고 간직하기에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의 그릇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하다가 쉽게 다른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려다가 하느님의 사랑을 잃고 맙니다.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호감 면에서는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랑한다고 해야 할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러나 꽃을 사랑하면 꽃에 물을 주지만
좋아하면 꽃을 꺾어 자기 화병에 꽂아 결국에는 죽게 만들 듯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려다가 오히려 잃게 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오해한 거였고
실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사랑한 거였습니다.
그러나 오해가 이해로 바뀌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의 배반으로 자기의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었으며
반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진정 사랑하셨고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참 사랑임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사랑케 되었습니다.
수난 전의 사랑과 수난 후의 사랑은 이렇게 다른 법입니다.
고통과 수난으로 정화되지 않고 담금질되지 않으면
사랑은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됩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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