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7월 31일 가해 연중 제17주간 월요일(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dariaofs 2017. 7. 31. 07:06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보아 출신인 파브르(P. Faber), 나바라(Navarra) 출신인 사베리오(F. Xaverius),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이냐시오는 동료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마태 13.31-35)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하느님 나라는 확장한다는 것이 오늘 비유들의 뜻입니다.

그런데 커져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이지 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비유를 가지고 자기가 커지고,

자기 사업이 커지는 것으로 아전인수 격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런데 내가 하느님이고, 나의 사업이 하느님의 사업이며,

나의 가족이 하느님이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나를 비웠고,

나의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뜻을 비웠으며,

나의 가족이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봉헌했는가?

 
언젠가 북한 일과 관련하여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많은 어려움 가운데 계약이 성사가 되었을 때의 얘기입니다.

 
저는 제가 하려는 일이 옳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일단 일을 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하느님의 뜻이면 그래서 하느님의 일이라면

오늘 비유의 말씀처럼 잘 될 것이고 확장할 것이지만

그 일이 저의 일이라면 망할 것이라고 믿기에

북한 일. 특히 평양에 종합 복지관을 짓는 일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4년을 끈 그 일이 계약이 결렬되어 완전히 끝장이 난 것으로

생각되어 저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그렇게 마음 정리까지 했는데

한 보름이 지났을 때 북한에서 다시 계약을 맺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저는 성당으로 달려가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뒤통수를 맞은 듯 저의 잘못에 대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 사업을 하느님의 것이 아니라

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사업이 하느님의 사업이라고 진정 생각했다면

왜 제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까?

내 사업을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했기에 감사드린 것 아닙니까?

 
그 순간 저는 다시 그 사업을 저에게서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이 사업은 제 것이 아니고 당신 것입니다.

다만 당신 사업에 저를 도구로 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금강산 피격사건으로 아무도 북한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이 사업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개업파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것이라면

그 사업이 언제 어떻게 다시 시작될지 모르지만 잘 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도 저와 같은 잘못을 범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세운 수도회가 자기의 뜻과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고

그것은 자기가 하느님께 받은 소명과 다른 거라고 생각되어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고 있었지요.

 
그때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프란치스코야!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느냐, 너냐? 나냐?

이 수도회가 누구의 것이냐, 네 것이냐? 내 것이냐?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려고 하기 보다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셨고

그래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비셨지요.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는 커지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고 하였지요.

 
내가 겨자씨처럼 작아지고 없어질 때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고 자랍니다.

또 내가 누룩처럼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헌신적으로 일할 때, 그리고

내 자녀나 다른 사람을 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키울 때

그때 나의 가정이나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가 되고 커질 겁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