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섬 태생으로 어느 순교자의 후손으로 어렵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이사하였기 때문에 성 에우세비우스는 로마에서 성장하고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베르첼리의 초대주교로 선출되어 그곳에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내의 성직자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성직생활과 수도생활의 일치를 시도했던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로 손꼽힌다. 그는 일단의 성직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는 정통 교회를 고수하는 강력한 주교였다. 아리우스파(Arianism)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 입장 때문에 그는 많은 곤욕을 치렀는데,
355년 밀라노(Milano) 회의에서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를 단죄하는 결의를 반대한 결과로 인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6년 동안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너무나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하였기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또 그 다음에는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로 유배를 갔다.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유배된 주교는 각자의 교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에 따라 귀향하였고,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는 사절로 뽑혔는데, 그의 임무는 331년에 아리우스파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티우스(Meletius)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였다.
그 후 그는 일리리쿰(Illiricum) 지방을 다니며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고, 363년에 베르첼리로 돌아왔다.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아리우스파와 싸우는데 보냈다.
베르첼리에는 라틴어로 된 복음서 사본이 보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본을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라고 한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
성 베드로 율리아누스 예마르(Petrus Julianus Eymard)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의 라 뮈르 디제르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칼 장수였으므로 18세 때까지 부친의 일을 거들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라틴어를 배웠기에 1831년에 그르노블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34년 7월 20일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동안 샤트와 몽테나르 본당 사목자로 일하던 중 마리스타가 되기 위하여 주교의 허락을 청하였다.
1839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받은 후 그는 벨리 소신학교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845년에는 리옹(Lyon) 수도원의 관구장이 되었다.
한번은 그가 주님의 성체 축일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나의 영혼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나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분의 현존을 전하겠습니다.”
1851년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는 노트르담 드 푸르비에르를 순례한 후 ‘성체 사제회’ 설립을 구체화시켰다.
1856년 마리스타 총장의 승인을 받은 그는 12일 동안이나 파리(Paris)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래서 1857년 1월 6일 이 위대한 수도회가 빛을 보게 되었다.
1858년 그는 또 ‘성체 시녀회’를 설립하였고, 1895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Maria Vianney, 8월 4일) 신부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성인이었다.
그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62년 12월 9일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포르치운콜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축일 (집회 24,1-4. 16. 22-31; 갈라 4,4-7; 루카 1,26-33)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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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서 고유하게 지내는 포르치운콜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축일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각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을 “어디보다도 사랑하였고, 자기 형제들에게 이곳을 특별한 경의(敬意)를 가지고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복되신 마리아께서 “엄위하신 주님을 우리의 형제가 되게 하셨고”(2첼라노 198),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리아 신심은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신 데(갈라 4,4-7)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성인은 마리아를 통하여 비천하고 연약한 우리에게 ‘사랑 덩어리’가 되어 오신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주님을 거저 품을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주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온몸으로 찬미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복되신 마리아를 형제회의 수호자요 변호자로 삼으셨습니다.
이 성당에서 “작은형제회가 태동하였고”(2첼라노 18),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인이 형제들을 파견한 곳도 이곳이요, 돗자리 총회와 형제들의 총회가 열린 곳도 이곳입니다.
초기 형제들은 복음선교를 떠나기 전에 여기서 영신적인 준비를 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이 조그만 성당을 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성인은 1226년 10월 3일 여기서 ‘죽음 자매’를 맞으며 귀천의 길을 떠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형제가 되어 오신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지요.
아울러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주님의 어머니께 깊은 애정과 공경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말없는 미소, 다가가 함께 해줌, 소리 없는 들어줌, 조건 없이 존재 전체를 서로에게 건네주는 ‘여성적이고 어머니다운 영성’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님처럼 ‘모두를 품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다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도 자신의 전 생애를 생명과 창조의 주인이신 주님과 변호자이신 주님의 어머니께 맡겼던 성인과 함께 더욱 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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