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8월 4일 가해 연중 제17주간 금요일(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dariaofs 2017. 8. 4. 05:49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Lyon) 근교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 농부인 마태오와 마리 블루즈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비안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5세 때에는 파리(Paris)에서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안네는 어린 시절을 주로 부친의 농장에서 양을 치면서 지냈다.

 

정규 교육은 몇 개월밖에 받지 않았지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여 비밀리에 첫 고해(1794년)와 첫영성체(1796년)를 받았다.

18세 때 부친의 허락을 받고 에퀼리(Ecully) 본당 발레(Balley)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개인적으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기초 교육이 부족하고 수학 능력도 많이 떨어졌다. 특히 라틴어 공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신학생이었던 비안네는 1809년에 징집을 당해 갖은 고통을 겪었다.

 

1811년에 베리에르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과정을 공부하고 1813년에는 리옹의 대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으나,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퇴학당한 비안네는 학과 성적은 부족하였지만 발레 신부의 도움으로 신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신심과 성품을 인정받아 1815년 8월 13일 그르노블(Grenoble)에서 시몽(Simon)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발레 신부가 있는 에퀼리 성당에서 2년 동안 보좌 신부로 생활한 비안네 신부는 1818년에 230여 명의 주민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42년 동안이나 봉직하면서 주민들에게 열렬한 신심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비안네 신부의 노력으로 아르스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일신되었고, 그 또한 설교자와 고해신부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1827년부터 수천 명의 고해자들이 그에게 성사를 받기 위해 한적한 시골 마을 아르스로 찾아올 정도였다.

 

매년 2만여 명의 신자들이 비안네 신부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는 오전 11시에 설교를 하고 성무일도와 식사, 특별한 상담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약 18시간 정도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잘못 판단하고, 그를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이며 허풍선이라고 비난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이나 모두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를 옹호하였다.

이렇게 열심한 그 역시 가끔씩 사탄의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성품은 지극히 단순하였고, 충고는 간단명료하였으나 신심이 차고 넘쳤으며 직선적인 설교를 하였다.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것은 모두 수도원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비안네 신부는 열심한 성무에 지친 나머지 1859년 8월 4일 73세의 나이로 아르스에서 사망하였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가 된 비안네 신부는,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으며, 1929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마태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여기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가난한 목수라는 이유만으로 요셉을 천대하고 무시했음을,

또 같은 이유로 요셉의 아내 마리아도 업신여겼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기 전에 이미 요셉과 마리아를 무시했고,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인데,

이 말은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라는 뜻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만 예수님을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유다 지역 사람들은 갈릴래아 지역과 갈릴래아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그런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가난한 목수 요셉을 선택하셨을까?”

또는 “요셉에게 더 좋은 직업을 주시지 않았을까?”

또는 “하느님께서는 왜 예수님이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 되게 하셨을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은 가장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 세상의 가장 아래쪽으로 내려오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비움’과 ‘낮춤’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기만 했고, 안 믿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일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출신이나 배경이 보잘것없었다는 점보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바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하시는데,

사람들이 바란 것은 세속적인 부귀영화, 출세, 재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자렛 사람들도 처음부터 무조건

예수님의 집안만 보고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루카 4,23).”

만일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나자렛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어떤 일을 하셨거나,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주셨다면,

그들은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의 사람들 가운데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배경이나 출신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예가 ‘빵의 기적’ 때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은,

그들이 원한 것은 ‘영적 구원’이 아니라 ‘현세적인 복’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서 받아야 할 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보다 현세적인 복을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나자렛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렇지만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께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는 말씀은,

‘일용할 양식’을 주기를 거절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배가 고프다고 호소하기 전에

사람들의 배고픔을 먼저 가엾게 여기신 분입니다(마태 15,32).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은 필요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지려고 욕심내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전교구구신풍본당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