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속 인 물

192. 아합과 이제벨 4 - 신은근 신부

dariaofs 2018. 4. 30. 01:30



역사에서 아합은 유능한 왕이었다. 이스라엘에 안정을 가져다준 인물로 보고 있다. 지중해 최강자 페니키아를 혼인으로 끌어들였고 남쪽 유다와 우호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남북이 처음으로 화해하고 군사동맹을 이룬 것이다. 이후 북쪽은 모압을 장악했고(2열왕 3,4) 남쪽은 에돔을 속주로 만들었다(1열왕 22,47). 동쪽의 아람족도 2차례 전쟁으로 기를 꺾었다.


두 번째 전투에선 왕을 사로잡지만 풀어주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막강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후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도시를 국제화한다.


사악한 왕으로 기록된 결정적 이유다. 왜 그랬을까? 이스라엘은 페니키아 수교로 번영을 누렸다. 상업적 부富가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주와 더 많은 왕래를 위해 바알 신전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이 갖는 특별한 위치를 사마리아에도 심으려 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반발이 심했다.


예언자 그룹과 제관 계급은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왕비 이제벨이 강력히 대응하자 저항세력은 지하로 잠입했다(1열왕 18,4).

 

아합시대 종교의 또 다른 구심점은 분명 이제벨이었다. 그녀 뒤엔 돈을 쥔 페니키아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짓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예언자와 제관 계급에겐 충격이었다. 이스라엘 존폐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상징적 저항 인물은 엘리아였다. 그를 중심으로 정통신앙 수호자들이 모였다.


이들이 세력을 넓히면서 접촉한 인물이 예후다. 국경에서 전차부대를 이끌던 사령관이었다. 군의 실세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그를 택해 왕으로 선언한 이는 엘리야 제자 엘리사였다(2열왕 9,1-4).


실행에 옮긴 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예언자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예후는 군대를 이끌고 왕을 살해하러 간다. 쿠데타였다.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은 아람족과 싸우다 부상당해 이즈르엘에 있었다.


유다 임금 아하즈야는 병문안 와 있었다. 두 사람은 국경을 지키는 예후가 반란을 일으킬 줄 전혀 예측 못 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두 임금은 살해된다. 반란군은 이제벨과 아합 가문에 속한 이들도 모두 죽였다.


대학살이었다. 당연히 바알 신전도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10번째 임금 예후는 이렇게 등장했다. 하지만 페니키아 동맹은 깨진다. 남쪽 임금 아하즈야를 죽였기에 남북동맹도 끝이 났다. 아람족이 침입하자 힘을 쓰지 못했다(2열왕 10,33).

아시리아가 공물을 요구하자 순순히 응해야 했다.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검은 오벨리스크엔 아시리아 왕에게 납작 엎드려 절하는 예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마산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