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는 유다 16번째 왕으로 재위기간 BC 640~609년, 31년간 왕으로 있었다. 사실상 마지막 임금이다. 그가 죽자 4명의 왕이 더 등장했지만 유다왕국이 택한 것은 아니다. 이집트와 바빌론이 임명했다. 요시야는 한창나이에 죽었다.
이후 유다는 급격히 기울었고 강대국의 간섭과 꼭두각시 왕들로 멸망했다. 요시야는 부친 아몬이 즉위 2년만에 쿠데타로 죽자 8살에 왕이 되었다. 반란세력은 집권하지 못했다. 급변 속에서 요시야를 지킨 이들은 제관들이었다.
그들은 어린 왕을 보필하며 훗날의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이들이다. 히브리인은 처음부터 주님 유일신만 믿었던 건 아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뒤에도 신앙에 있어선 혼합주의였다. 주님도 믿고 가나안 토착 신도 섬겼다.
그래서 산당 제사가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민중 신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요시야는 재위 18년에 대대적인 성전 수리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율법이 담긴 책을 발견했다(2열왕 22,8).
구약성경 5번째 책인 신명기다. 발견된 율법서는 개혁의 지침서가 되었다. 먼저 성전 안에 있던 이방인 신상과 제단을 찾아내 키드론 골짜기에서 불태웠다. 우상숭배와 조금만 선이 닿아도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리곤 마침내 산당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종사하던 사제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2열왕 23,20). 공포 분위기였다.
개혁은 북이스라엘 수도 베텔에서도 실시되었다. 첫 임금 예로보암은 이곳에 산당과 제단을 세우고 제사 지냈던 것이다.
북쪽 백성이 남쪽 예루살렘에 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요시야는 베텔 산당을 헐어버린다.
그리곤 인근 무덤에서 뼈를 가져와 제단 위에서 태웠다(2열왕 23,16). 시체 뼈를 태워 부정한 곳으로 만든 것이다.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행위였다. 북쪽 사람들은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요시야가 북쪽 땅 일부를 되찾았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개혁은 성공하지 못한다.
종교 혁신은 유다가 망한 뒤 실현되었다. 요시야 때 확립된 모세오경 때문이다. 율법이 정착되었기에 제관들이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국땅을 떠돌면서도 뭉칠 수 있었던 이유다. 이후 혼합 신앙은 힘을 잃었고 주님 신앙만 남게 된다.
지방의 종교 권한은 사라지고 예루살렘 권위만 유일해졌다. 모세오경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요시야는 현대 유대교의 문을 열었던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마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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