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세 제자는 타볼산에 올랐다가 이제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산에 오르지 않고 밑에 남아있던 제자들이 군중들과 함께 웅성거리며 예수님 일행을 맞이합니다. 뭔가 문제가 발생한 듯합니다.
알고보니 한 아버지가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고쳐보고자 용하다는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안계시다니,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부탁했는데 별 성과가 없었다네요.
이제 예수님을 만나니 모두들 그분께로 달려옵니다. 아버지는 "하실 수 있다면" 기적을 좀 베풀어 주십사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야단치십니다.
그런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나겠냐고. 그런 확신도 없이 어찌 이런 영을 몰아낼 수 있겠냐고 말입니다. 너의 확실한 믿음 없이는 어림도 없다는 깨우침입니다.
그제야 그 아버지는 크게 깨닫습니다.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고백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사실 기적은 그것을 청하고 바라는 이의 믿음과 치유자의 기도의 힘이 결합되어 하늘을 움직여 하늘이 내려주시는 후한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치유하지 못한 제자들을 ‘믿음이 없는 세대’(마르 9,19)라고 꾸짖으셨고, 아이 아버지에게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9,2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이 아버지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9,24)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려고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청하는 사람의 이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믿음이 없어서 기적을 거의 행하실 수 없었던 고향 나자렛 사건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묻자,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9,29)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믿음의 가장 분명한 표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또 하시는 분이시라는 신앙 고백이며, 신앙인의 모든 활동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짐을 인정하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오늘의 묵상 중에서) 치유자인 예수님이 많은 이적들을 행하실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도 기도 없이 치유를 하지 않으셨는데, 기도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지도 않는 사람이 어찌 감히 치유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이 복음을 만나면 이렇게 "믿음"이나 "기도"라는 말씀이 주로 제게 다가왔었는데, 이번에는 시종일관 그 "아이"에게 마음이 갑니다.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마르 9,19) 예수님께서 먼저 아이를 보고싶어 하십니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9,21) 굳이 그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병 이상으로 그 아버지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치유에 한 몫을 하도록 배려하시려는 걸까요?
아이 아버지가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그의 믿음 상태가 드러나 버립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 치유에 대한 희망을 굳게 가지고 있는 그에게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반드시 나으리라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빈 곳을 정확히 간파하신 예수님의 지적에 그 아버지는 체면도 자존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외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9,24) 이 절규에 가까운 애원에 얼마나 간절한 사랑이 묻어나는지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제게 다가오신 말씀, "아이"에는 예수님의 연민이 들어 있습니다. 그 연민이 아이를 낫게 하시면서 그 아버지의 믿음을 도구로 쓰십니다.
그동안 용하다던 이의 능력에 아이를 맡기고 처분만 바랐던 그 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굳은 믿음이 아이를 살리고 지킬 수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아이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도 구원을 받은 겁니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9,25)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꾸짖어 쫒아내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이 아이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아이의 손을 잡아 다른 일으키시니"(9,27) 모두가 겁에 질려 죽었다고 생각해 손을 대지 못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친히 아이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아이는 곧 일어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아이"가 마치 주인공인 양 부각되어 다가옵니다.
상황 종료 후, 아이도 아버지도 군중도 기쁨에 차 하느님을 찬미하며 돌아갔을 텐데, 제자들은 여전히 뭔가 편치 않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스승 덕분에 (아버지의 믿음 덕분에) 그토록 험한 병에서 치유 받은 것에 대해 함께 안도하고 축복하기보다 자기들이 더 관심사였을까요? 그들은 아직도 자기 '능력'에 꽃혀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면 ... 할 수 없다."(9,29) 실패 체험 후 "따로" 그 이유를 여쭙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방법은 "기도"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십니다.
기도는 단순히 위험을 피하고 복을 얻기 위해 절대자에게 비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고 믿고 희망하는 이가 절대자께 드리는 고백이요,
그 고백을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스스로 믿음이 없음을 인식하고 아들을 위해 믿음을 청한 그 순간의 외침만큼 절절한 기도가 있을까요?
또 방금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내려오자마자 맞닥뜨린 가련하고 처참한 아이에게 가지신 연민만큼 강력한 기도가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알아보며 헤아리실 뿐 아니라 그것을 당신의 모든 일에, 모든 피조물에게 후한 마음으로 쏟아부으셨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집회 1,9-10)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아 알 수 있는 지혜를 선물로 후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복되십니다. 그런 아버지를 굳게 믿고 신뢰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의 그 아버지처럼,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하고 고백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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