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함구령을 내리실 때도 자주 있습니다. 왜 그러실까 의문이 들지 않나요? 오늘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마르코의 입을 통해 밝혀지네요.
"예수님께서는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마르 9,30-31)
우선 제자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중요했나봅니다. 제자들이 확실히 당신에 대해서 알기 전에는 곤란하다고 느끼신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 따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치신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당신의 기적과 사랑이 드러날수록 곁에 있는 제자들이 메시아 도래의 진정한 목적을 깨닫기도 전에 자칫 허영과 교만에 들떠 세속적 지위와 권력을 꿈꾸게 될까 봐 그러신 것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은 오늘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9,34)는 문제로 자기들끼리 대놓고 논쟁을 벌이기까지 합니다.
논쟁의 원인을 물으시는 예수님께 차마 입을 열지 않는 걸 보면 자기들의 욕망이 스승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 듯합니다.
타볼산 체험 때부터 일부는 천국체험을 하였고, 남아있던 이들은 연옥체험을 하고나서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지요.
천국체험을 한 이들은 남아있던 이들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체험을 자랑하면서 괜히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것인 양 좀 으스댔을 거라 생각됩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찜찜하던 이들은 더 속이 상했을 것이고, 급기야는 말다툼까지 벌이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모든 이의 꼴찌, ... 모든 이의 종."(9,35) 그들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는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모든 이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일을 완수하시고, 죽음으로 세상의 끝까지 내려가셨던 분이시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9,35)
당신이 그렇게 사시는 분이니 당연히 체험적 가르침을 전수해 줄 수밖에 없겠지요. '내가 살아보니 말이다. 진짜로 훌륭한 사람은 꼴찌와 종이 되는 사람들이더라. 이 말 알아듣겠니?'
예수님은 어린이를 시청각 교재로 활용하여 예화로 삼으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 그를 껴안으시며..."(9,36) 우리 예수님은 참으로 정도 많고 어찌 그리 다정다감하신지요.
특히 어린이들와 약자들에게 그러하시지요. 예수님이 옹호하시는 "꼴찌, 종, 어린이"는 제자들이 욕망하는 "큰 사람"과는 명백히 대조를 이룹니다.
집회서 저자는 1장에서 지혜를 예찬하더니, 2장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행복을 약속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집회 1,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주님 앞에서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집회 2,2)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꼭 껴안아 주신 어린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엄마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아기에게 흔히 '엄마 껌딱지'라는 별명을 붙여 놀리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도 그처럼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보다 작아야 엄마에게 매달릴 수 있는 것이 당연하듯이, 우리도 무조건 주님보다 작아야 주님께 매달릴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보다 더 크고 무거운 존재를 매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살은 빼긴 빼야할 것 같네요. ㅎㅎ
예수님은 모든 이의 꼴찌로, 모든 이의 종으로 오셔서 자꾸자꾸 작아지고 계시는데 제자들은(우리들은) 자꾸자꾸 크고만 싶으니 큰일입니다.
겸손으로 낮아지고 작아지고 희미해져 보이지 않게 되실 때까지, 결국 온전히 비워 '無, 없음'이 되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더 가득 채우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매달려 붙어 있기 어려울 겁니다.
아니, 어쩌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만물은 자라고 넓히고 채우는 속성이 있기에, 내려가고 줄이고 비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곧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물살을 거슬러 역행하는 것입니다.
쉽지 않고 이해받기도 어려운 길이지요. 그래서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그 어려운 길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화답송)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스승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작아지고 비천해지고 비울 지향만 있다면, 그 다음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면서 딱 이대로만 하면 됩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네 마음이 청하는 대로 주시리라."(화답송) 마냥 천진난만하게 주님께 매달려 빙글빙글 웃는 어린 아이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의 순수하고 사랑스런 바람을 아버지가 어찌 모른 채 하시겠습니까!
작은 이의 바람은 청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가난이 그의 가난을 알아보고 껴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를 껴안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모든 일이 잘 되고 술술 잘 풀릴 때는 사는 것이 문제 없고 신앙생활도 즐겁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경이나 시련이 닥쳤을 때이지요. 이 시련과 역경이 찾아오지 않는 인생은 없다는 게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허둥대지 말고 그냥 주님께만 의지하고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면 된답니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닥쳐도 그분을 믿고 참고 견디기만 하랍니다.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기다리면서.
오늘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친다해도 이렇게 해봅시다. 하느님이 내편이신데 그분께만 매달려 있으면 다 지나갈 겁니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작은형제회)
'강 론 말 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9.02.28. 연중 제7주간 목요일 (0) | 2019.02.28 |
|---|---|
| 2019.02.27. 연중 제7주간 수요일 (0) | 2019.02.27 |
| 2019.02.25. 연중 제7주간 월요일 (0) | 2019.02.25 |
| 2019. 02. 24. 연중 제7주일 - 장재봉 신부 (0) | 2019.02.24 |
| 2019.02.23.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0) | 2019.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