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말씀을 통해 바르나바 사도의 매력에 푹 빠져볼까 합니다.
복음에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내용입니다.
"...도 ...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모든 것을 당신께 의탁함으로써 신앙을 키워 가난의 덕을 얻고, 그로 인해 바람처럼 가벼이,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복음 선포의 길을 걷기를 바라십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르나바의 비움과 의탁의 모범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지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4,36-37)
또 복음은 사도들에게 치유와 구마, 소생 등의 기적을 베풀 힘과 더불어 호의를 베풀 때의 마음가짐을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13)
사실 바르나바의 사도로서의 행적 가운데 진정으로 교회에 큰 기여가 되었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일은, 사울이 교회 안에서 바오로 사도로 자리잡고 설 수 있도록 보증하고 조력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이 회심한 후에 제자들과 어울리려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지요. 워낙 악명(?)이 높았다 보니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르나바가 나섭니다.
그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 이야기해 주었고"(사도 9,27) 유다인들의 암살 계획을 피하도록 타르수스로 보내 줍니다.(사도 9,29-30 참조)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오게"(사도 11,25) 됩니다.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의 예언자들과 교사들 사이에 이름을 올리게 되지요.(사도 13,1 참조)
성경은 바르나바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고 덧붙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끌 수 있는 복음 선포자의 매력은, 선함과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랑의 기운임을 알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떠나는 사도들에게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11)고 하시지요.
바오로에게는 바르나바가 "마땅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영성체송)는 말씀처럼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의 친구가 되어 준 것이니까요.
그런데 함께 활발히 복음을 전하던 환상의 짝 두 사람도 언젠가는 우여곡절 끝에 갈라지게 되는 지점이 있지요.(사도 15,36-41 참조)
이 또한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는 말씀처럼, "떠날 때가 되면" 어디에도 인간적으로 고착되거나 집착하지 말고 복음 선포자의 길을 가라시는 하느님의 큰 그림 안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일원은 아니었지만, 성경에 드러난 정보의 단편들을 이어보면 바르나바는 편견이나 선입견이 적고,
사람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는 시각을 가졌으며, 아낌없는 신뢰와 전폭적 지지로 사람 안에 잠재된 하느님의 계획을 끄집어 내는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초대 교회 공동체가 태동할 때 가진 바를 아낌없이 봉헌해 힘을 보태는 통 크고 신앙 깊은 면모도 보입니다. 게다가 착하다니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괜한 호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르나바 성인이 사도들에게 당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고 충실히 따르고 실행한 전형적인 "따라쟁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바르나바"가, "친구"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마땅한 사람"이 있습니까?
마땅한 사람!
사실 주님의 길, 복음 선포의 길에 들어서면 가난과 외로움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당혹스럽고 고통스런 메마름 중에 "마땅한 사람"을 반드시 챙겨 보내주신다는 걸 체험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도 사람이기에 그에게도 복음이 될 존재가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주님께서 보내주신 이를 통해 받는 지지와 격려, 위로는 하느님께서 때때로 허락하시는 고독만큼 영적 삶에 중요한 양분이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보내주시는, 참으로 고마운, 친구가 되어준 이들에게 가난한 우리가 갚아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그건 예수님 말씀처럼 "평화"(마태 10,12)를 빌어주는 것일 겁니다.
이는 결코 작은 보답이 아닙니다. 평화는 우리에게 성령과 함께 주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가까운 축원이니까요.(요한 20,19 참조)
오늘 특별히 내 삶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쳐간 모든 은인들, 친구들, 조력자들, 무수한 "바르나바"를 기억하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 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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