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에서 Before 와 After 사진이 나란히 놓인 경우를 자주 보지요. 그런데 인류 역사에도 Before 와 After 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과 이후입니다. 특히 믿는 우리들에게는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확연하지요.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21)
옛사람들.
우리야 옛 계약과 새 계약에 대해서 역사와 교리와 통해 배워 알지만, 갈등과 변화의 과정 한가운데 있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옛것과 새것의 확실한 구분점을 규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육화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시면서 이를 군중에게 "옛"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십니다. 과거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맺으신 계약과, 그분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는 이들을 "옛사람들"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1)
이 말씀에는 새 계약의 백성이 될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주체는 성부 하느님에게서 성자 예수님으로 바뀌고, 대상도 옛사람들에서 "너희" 곧 새 계약의 백성들로 옮겨갑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의 한계를 너울로 표현합니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2코린 3,15)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여겨왔으며, 시나이 계약 때에는 모세의 중재를 요청합니다.
또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이 빛나자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 앞에서 얼굴을 너울로 가리지요.(탈출 20,18-21; 34,29-35 참조)
너울은 하느님과 직접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옛사람들에게 안전장치인 동시에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라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감도 시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2코린 3,16)
어쩌면 율법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너울과 같을 겁니다. 하느님과 직접 접촉하지 않으면서 그분 뜻을 전달받을 수 있는 중간 단계이면서, 무지, 해석, 적용의 편법에 숨을 수 있는 가림막 구실도 가능했지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후, 예수님께서 이 너울을 걷어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율법을 대신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근접할 수 없다고 여겼던 엄위와 영광의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너울 대신, 율법 대신 예수님께서 자리하십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되었고(요한 14,9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대면하게 되었으며(요한 14,10 참조) 이로써 하느님과 직접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요한 15,9-10 참조)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명하는 범위를 훨씬 더 넓게 확장하십니다. 살인 정도가 아니라 형제에게 성도 내지 말고 '바보'나 '멍청이'라는 욕도 삼가라고 하십니다.(마태 5,22 참조)
예수님께서 "결코, 누구나, 최고 의회, 지옥" 등 다른 어느 때보다도 극단적이고 강렬한 언어를 사용하시니 이 명령이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권고 정도가 아니라는 걸, 말투에 깔린 강세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요구만 하시는 게 아니라, 당신도, 하느님도 손해를 감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형제끼리 화해하지 않으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은 예물을 안 받아도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건 물적 예물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의 회복, 상처 입힌 사람의 겸손한 통회입니다.
사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더 바라실 리 없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인간관계 안에서 파생된 죄책을 율법이 정한 바대로 뭔가를 바침으로써 털어버릴 수 있게 만든 제도는 성숙하게 선용하지 않는 한 복음적일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율법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너울이 되어버린 현실은, 화해를 위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하여 용서를 받으려 노력하기보다 합의나 공탁금 제도에 기대려는 오늘날의 면피성 제도 악용과도 다를 바 없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 바라보면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두려움과 경외와 대상인 하느님이 이제는 같은 모습으로 닮아갈 수 있는 하느님, 당신을 닮도록 허용하시는 하느님이 되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기에"(2코린 4,6) 가능해진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율법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합니다. 최소를 살지 말고 최대를 살자고 하시는 겁니다.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율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사랑을 살자고 하시면서 당신 몸소 사랑이 되어 율법을 대신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따를 법이란 사랑의 법, 예수님의 길뿐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에게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 제자들을 알기 전과 그 후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벗님 여러분에게 Before 와 After의 구분점이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새 사람의 길을 걷는 벗님의 여정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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