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오늘의 복음 내용은 어제 복음(루카 9,51-62) 후반부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문맥은 다릅니다.
루카 복음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도중 사마리아인 마을에서 배척을 받으신 후 "부르심과 따름"에 대해 이야기하셨다면, 오늘의 마태오 복음 대목은 치유와 기적 사화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즉 어제 루카 복음에서는 마치 실패처럼 보이는 배척을 당한 후 소명에 대한 현실 자각의 차원으로 "따름"을 이야기하셨다면, 오늘의 마태 복음은 성공 신화에 들뜬 제자들의 발을 땅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따름"의 실상을 이야기하시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좀더 들여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마태 8,18)
계속되는 치유에 놀란 군중이 기쁨과 희망을 안고 몰려드니 제자들 마음이 어땠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서둘러 군중과 제자들을 분리시키시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명령하셨다!"는 다소 강한 어휘에 담겨 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을 한 이는 어제의 "어떤 사람"(루카 9,57)에서 "율법 학자"(마태 8,19)로 구체화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이 식자층에게도 그 권위와 신빙성을 인정 받았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종교적으로 기득권층에 속한 율법 학자에게 당신의 길이 소속도 기반도 없는 '비움의 길'임을 명백히 하십니다. '이래도 나를 따를래?' 하시며 따르겠다는 자기의 청을 스스로 검열하고 걸러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상 도리부터 해결하고 오겠다는 이에게는 당장 따르라고 하십니다.
본래 죽은 이의 장례는 생전에 관계를 맺은 산 이들의 몫인데 그마저 죽은 이들에게 맡기라고 하시면서요.
그런데 뒤에 언급하신 "죽은 이", 즉 느닷없이 남의 장사를 지내게 생긴 "죽은 이"는 물리적 목숨이 끊어져 세상에서 죽은 이가 아니라, 오히려 세속 삶에 묶여 영이 죽은 이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 무심한, 부르심과 따름을 알아듣는 감각이 무뎌지고 마비되어 죽은 것과 다름 없이 된 이들 말입니다.
언뜻 예수님의 답변이 일관성을 잃은 듯 보이지요. 누구에게는 '오라' 하시고 누구에게는 '이래도 올래?' 하시니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제자를 원하시는 걸까요?
제1독서는 주님과 아브라함의 긴박감 넘치는 대화를 담고 있는데,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명령을 내려 그들이 ...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창세 18,19)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첫번째 이유는 주님은 아브라함이 당신의 약속을 사유화해 저 혼자 누리거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게 소홀히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았고 또 받게 될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은총의 선물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창세 18,25)
소돔의 멸망을 강행하시려는 주님께 두 차례나 반복해 드린 이 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원시적인 고대 풍습에 속해 살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매우 건전하고 건강한 신관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두번째 이유일 겁니다.
"혹시 그곳에서 의인 쉰 명(마흔 명, 서른 명, 스무 명,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몹시 조심을 하고는 있으나 어떻게든 소돔의 멸망을 막아보고자 반복해 여쭙는 용기와 집념은 분명 제 자신과 집안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우리도 슬슬 불편함이 올라올 만큼 반복적이고 끈질긴 이 청원을 주님은 인내롭게 받아 주십니다.
주님은 참 속도 좋으셔서 그런 걸까요? ... 어쩌면 그분은 이런 아브라함의 염려 가득한 조바심이 흡족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바로 주님 당신의 마음을 닮았으니까요!!!
당신 손으로 만든 생명을, 일부의 죄악 때문에 무죄한 이까지 모두 멸망시키려는 순간, 주님의 마음은 아브라함보다 더 간절히 중단의 명분을 찾고 싶으셨을 것 같습니다. 당신 말씀이 거두어져도 좋으니 사랑하는 피조물을 살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마치 제 일처럼 가슴 졸이며 감히 주님께 끈질기게 은근히 들이댈 만큼, 사랑 때문에 무례해지기를 택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닮은 마음, 창조주 주님의 주저하고픈 심정을 제대로 읽어드리는 마음, 이것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세번째 이유인 듯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아브라함은 충실한 응답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죠.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 곧 뽑힌 백성이 되어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인류 전체에 선사합니다.
우리가 받는 부르심도 나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이든 역할이든 모든 부르심은 현재적 혹은 잠재적 공동체의 성장과 구원을 염두에 두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벗님도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하시면 따르십시오. "이런데도 따를래?" 하셔도 잘 생각해 보고 따르십시오. 그분께서 우리를 지명해 말을 건네실 때는 우리가 품은 씨앗의 열매를 이미 보고 계신 것입니다.
무슨 씨앗인지 무슨 열매인지 우리는 몰라도 그분은 다 아시니 그러시는 겁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헛된 겸손 뒤로 숨지 말고 그저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디십시오.
여러분의 발걸음이 사슴의 발걸음처럼 가볍고 날래게 주님의 산을 오르내리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강 론 말 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9.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0) | 2019.07.03 |
|---|---|
| 2019.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0) | 2019.07.02 |
| 2019,06,30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 서광휘 신부 (0) | 2019.06.30 |
| 2019.06.29.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0) | 2019.06.29 |
| 2019.06.28.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0) | 2019.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