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회개' 또는 '회심'(metanoia)은 '방향의 전환'을 뜻합니다.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을 뜻하지요. 오늘 미사의 독서들에는 '돌아서길 거부한 이'와 '돌아선 이'가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둘 다 하느님을 향해 방향성이 고정됩니다. 독서의 엘아자르는 원래부터 지켜오던 방향을 유지, 고수했고, 복음의 자캐오는 회심으로 방향을 바꾼 덕에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두 갈래의 묵상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먼저 이 친숙하고 유쾌한 복음 대목에서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난 과정을 통해 '기도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4).
기도는 주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우리 곁에, 우리 위에 계십니다. 기도자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 시작됩니다. 은총입니다. 이 갈망을 불어넣으신 분은 분명 성령이십니다.
이 갈망에 사로잡힌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늘 현존해 계시지만 그저 자기 앞을 "지나시기"만 하셨던 주님을 이제는 꼭 붙잡고 그분과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달리다가 또다른 영감을 만납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그래서 그는 멈추고,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루카19,5).
이제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멈추십니다. 그리고 시선을 위로 돌려 그를 쳐다보십니다. 기도를 시작한 이의 노력이 헛되지 않습니다. 아스라한 막막함 속에서 주님을 부르는 그에게 주님께서 친히 "나 여기 있다"(이사 52,6) 하시는 듯합니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6).
기도자는 저 뜬구름 같은 이상 안에서, 거룩해 보이는 타인의 영성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실존이 뿌리 박힌 곳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손 내미신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한 "죄인의 집에 들어와 묵으십니다"(루카 19,7 참조). 이제 기도자는 자기 안의 내밀한 골방에 그분을 모셔들여 그분과 함께 머무릅니다.
황송하고 송구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밀려듭니다. 그런데 자기의 불결함과 자격 없음에만 묶여 있다가는 내 앞에서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계신 주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이토록 부족한 자신과 함께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컷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할 일이 떠오릅니다.
"보십시오, 주님!"(루카 19,8)
기도자는 고백합니다. 사랑과 자비로 절여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주님께 아룁니다. 변명이나 손익 계산 따위로 이성이 움직일 틈도 없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쏟아냅니다.
그의 마음을 차지하신 분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리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린 그는 이미 바보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그분은 어린애같이 들떠 큰소리를 뻥~ 치는 철부지의 소리도 주의깊게 경청하고 응답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구원"입니다. 이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한 "죄인의 집"을 끌어안아 어깨에 메신 것입니다.
이제 기도자는 말씀하시는 주님을 마치 온 존재가 귀가 된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그분 말씀을 듣기 위해 온 몸의 세포를 다 집중해서 귀 기울이고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맺힐 것입니다. 자기 안위와 탐욕과 욕망을 위해 거침없이 살아온 한 인생이 하느님께 돌아서면서, 하느님 모상인 피조물이 비로소 제 방향을 찾았으니 이제 그 열매는 이웃들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흘라갈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자 자신이 주님을 만나 구원될 것입니다.
두 번째 묵상은 '대상의 선택'에 대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교 예식을 강요받은 한 의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속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패싸움을 할 때 제일 강한 사람 하나만 제대로 제압하면 게임이 끝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교도들이 이 방법은 쓴 것 같네요. 동족에게 존경받는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2마카 6,18)인 엘아자르를 표적으로 삼았으니 말입니다. 이미 "아흔 살이나 된"(2마카 6,24) 그에게 참 잔인한 일이지요.
"주님께서는 내가 ...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2마카 6,30).
엘아자르는 그들의 비겁한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 장렬하게 신앙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2마카 6,31). 결국 이교도 예식을 강요하던 이들의 야비한 의도는 실패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이교도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을 표적 삼아 달래고 회유합니다. 자기들 의도가 먹혀들 경우 엄청난 파급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겐 표적이 된 한 사람의 인격과 구원보다 그 효과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사람의 아들은 다릅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냉대받는 이를 선택하십니다.
그를 포용했다가 더 많은 이들(바리사이들을 포함하여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열심한 이들)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실제로 오늘 자캐오를 선택하신 탓에 사람들의 투덜거림을 들으셔야 했지요.
하지만 그분은 이런 오해를 감내하시며 "세리와 죄인들"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방향성을 상실한 채 소외된 한 영혼이기에 그렇습니다.
이교도들과 달리 예수님께 한 영혼은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온 존재를 기울여 경청하고 관심 쏟아야 할 목적입니다.
이제 두 갈래의 묵상이 하나의 길로 엮입니다. 기도는 우리와 만나고 싶어 먼저 손을 내미시는 주님의 초대로 시작됩니다. 영혼을 건드리시는 주님의 터치를 감지한 영혼이 불타올라 달리기 시작하면서 엮어지는 사랑 이야기가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굳이 나를 선택하셨을까요? 그분의 선택 기준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말씀이 그 답을 알고 있으니 다시 구구절절 설명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의 영혼으로, 회심자로 불리운, 표적이 된 이는 그만큼 구원이 더 절실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 기도자가 되고 회심자가 되었다고 해서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만 알면 된답니다. 그저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릴 수 있게 된 은총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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