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11.18.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dariaofs 2019. 11. 18. 04:12



오늘 미사의 독서들은 매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 어떠한 난관에도 무너지지 않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복음 내용의 주인공은 예수님과 예리코의 눈 먼 이, 두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 군중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인 군중은 늘 좋은 역할만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루카 18,35).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눈 먼 이가 구걸하고 있는 예리코에 "가까이" 가십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 방향성과 운동성으로 시작합니다.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루카 18,36).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청력이 예민한 그는 지금이 여느 날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예수님을 보러 나온 군중이 내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들은" 이는 바로 그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루카 18,37).

궁금해 묻는 그에게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군중에게 예수님은 "지나가시는" 존재에 불과한가 봅니다.


절실함이 없어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방향성과 운동성을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시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나가시는" 예수님 곁을 떼지어 걸으며 그분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끼어듦, 개입"이 없습니다. 그저 서로 타인일 따름입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 그는 더욱 큰 소리로 ... 외쳤다"(루카 18,39).

눈 먼 이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예수님께 목청껏 외칩니다. 그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 행동 반경의 제약이 큰 그는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님을 놓칠 수 없습니다.


소문에 듣던 예언자를 그저 평온히 감상하러 나온 이들에게 그의 절규가 불편하고 거슬렸을지 모르나, 그에게는 간절함을 넘는 절박함입니다.


그의 고통에 무감한 이들, 관계없다고 느끼는 이들의 방해도 그를 멈추지 못합니다. 눈 먼 이는 군중의 악역을 꿋꿋이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데려오라고 하셨다"(루카 18,40).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들으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소리를 그가 들었고, 지금은 그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그분께 가 닿았습니다. 예수님은 곧 걸음을 멈추십니다. 뭔가 일어날 징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큰 권능이 드러났던 예리코 성읍(여호수아기 참조)은 이제 신약성경에서 지명으로만 슬쩍 등장하고 마는, 예수님께서 그저 지나가신 고장으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리 나는 곳을 찾아 직접 움직이시지 않고 군중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움직이기 싫은 게으름이나 권위주의 때문이 아니라, 눈 먼 이에게 호의도 베풀다가 때에 따라서 악역도 자행하는 군중을 이 사랑의 기적에 참여시키시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군중은 그를 찾아 데려오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귀찮아하고 꾸짖던 이의 존엄함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박해자에서 돌보고 이끄는 이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루카 18,40).

이번에는 눈 먼 이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옵니다. 예리코에 "가까이" 오신 예수님께 그곳의 눈 먼 이가 "가까이" 다가갑니다. 물론 예수님을 에워싼 군중은 진작부터 물리적으로 그분께 가까이 있기는 했지만 진짜 관계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눈 먼 이는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달립니다. 누군가의 바람을 경청하고 이루어 주는 것은 예사의 관계를 넘어섭니다. 서로 깊숙히 들어갑니다. 관계가 형성됩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은 건 눈 먼 이의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에 예수님은 발목이 잡히십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눈의 빛을 얻습니다.


즉시 시력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18,43)고 하지요. 이미 본질을 향해 영혼의 눈이 열려 있던 그가 육신의 눈마저 뜨게 되니 남은 것은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일뿐입니다.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유로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를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3).

해피 앤딩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주인공인 예수님과 눈 먼 이의 흡족한 결말뿐 아니라 군중까지 변화가 되니까요.

사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하느님과 나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조연이거나 엑스트라거나, 배경 정도로 등장하는 이도 있지요. 그들이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위해 늘 좋은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여러 경로로 일찌감치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호의와 실수, 악역은 그들 인생 안의 역동일 뿐 하느님과 나와의 영원한 행복까지 무너뜨리거나 책임지지 못합니다.

때로는 그들을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착각해 많은 혼란과 왜곡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들으려 하고, 들으시게 하려고,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쓸수록,


두 주인공이 꿋꿋이 굳건하게 서서 일관되게 바라고 자비를 입는 사이에 조연들의 마음에도 변화의 실낱같은 빛줄기가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기적처럼 변화된 건 눈 멀었던 이의 시력뿐만 아니라 냉담하고 이기적인 군중의 마음이었으니까요.

제1독서는 유다 민족의 독립 항쟁사라 할 수 있는 마카베오기 초반부입니다. 오늘 내용은 이민족에 대한 유다인의 항쟁이 본격화하게 된 배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 차라리 죽길ᆢ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갔다"(1마카 1,62-63).

오늘의 복음 내용처럼 독서에도 행복한 결말이 한 눈에 보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치열하고 고통스런 항쟁사는 이제 도입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계약에 대한 신념으로 목숨을 바친 이들과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위해 인간적으로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의 간절함을 넘어서는 절박함을 바라봅니다.

평화의 시기에는 안정으로, 영광의 시기에는 풍요로 하느님을 체험하던 이스라엘이 박해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피와 죽음으로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당장 겪는 순간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평화와 번영 만큼이나 저항과 순교도 하느님 현존의 증거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 역사의 두 주인공인 하느님과 자기들의 계약을 위해 처절히 싸워나가지요.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하고 억압하기도 하는 이민족에게 하느님은 지나가시는 존재일 뿐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존재의 이유이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선물로 받은 내 삶의 두 주인공, 하느님과 나의 사랑은 괜찮습니까? 다른 조연들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거나, 조연에게 한눈 파느라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요?


가까이 오시는 그분이 그저 지나치시지 않게 하려면, 그분의 오심을 듣고 나의 마음을 들으시게 하려면 외쳐야 합니다.

내 바람을 불편해하고 거슬려하는 이들에게 매이지 말고 (금방 호의를 베풀다가 일순간 돌아서 방해하는 그들에게는 사실 내 문제가 자기 일처럼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꿋꿋하고 굳건히 외쳐야 합니다. 나의 간절한 바람과 일관된 추구와 하느님 자비의 개입은 결국 모두를 선으로 변화시킬 겁니다.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