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루카 17,26).
사람의 아들의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종말이라고도 하지요. 인간 편에서 볼 때 그날의 단점이라면 언제일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노아 때나 롯 때처럼 갑자기 들이닥칠 것이라 만회나 개선의 틈을 갖지 못할 것이니까요. 그런데 장점 역시 그날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평생 잘 준비했다 하더라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날이 소수를 제외하면 불안하고 두렵기는 매한가지일 테니 차라리 모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기도 하네요.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6).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8).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숨이 보장된 듯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며 일상을 누리던 중에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했던 두 사건의 예를 드십니다.
둘 다 성경에 등장하는 재앙의 날, 징벌의 날이지요. 노아 때는 '물'로, 롯 때는 '불과 유황'으로 모두 멸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무지하고 무심한 가운데 악행 속에서 준비 없이 그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지요.
오직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호의를 베푸신 두 가족, 노아의 가족과 롯의 가족만 생명을 건져 인류의 생명이 이어집니다. 그러니 아무리 호된 멸망의 갈퀴가 들이닥쳐도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희망하게 됩니다.
"내려가지 말고 ...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예수님께서 그날 그 순간에 이르러 괜한 것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재산은 물론, 과거의 영화도 고통도 그 순간 자기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살아온 자취만큼 형성된 지금 모습대로, 향하던 방향성대로, 존재하는 위치에서 맞이하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내려가는 것도 돌아서는 것도 구원에서 비껴가는 역행이 될 것입니다. 만일 변화가 필요했다면 그 전에 충분히 이루어졌어야 했지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구원의 개별성을 말씀하십니다. 다소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은총의 영역을 잠시 미루고 살펴본다면 구원의 공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준하여 쌓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잘 나와 있듯 각자의 선행과 자선도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공동체성은 별 의미가 없을까요? 사실 구원의 공동체성도 개별성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함께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며 좋은 배경이 되어 줌으로써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으니까요. 단, 좋고 선하고 열심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물리적 조건만으로 자신이 구원된다는 생각은 너무 안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내가 열심한 신자니까, 우리 공동체에 성인이 있으니까 노력 없어도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된다고 여긴다면 오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겠지요. 대충 묻어가다가 얼결에 들어선 곳은 그리스도의 오른쪽이 아닐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들어찬 이들"(지혜 13,1)을 안타깝게 여기는 지혜서 저자의 탄식이 들립니다.
그들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분을 깨닫지 못하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것들에 눈이 팔려 우상으로 받드는 우매한 이들입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지혜 13,5)는데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지혜 13,7) 만 그들은, 복음에서 언급하는 이들처럼 그것들에 둘러싸여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던 중에 느닷없이 그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영을 품기는 커녕 알아보지도 못한 채 껍질과 허울 속에 파묻혀 검불같은 인생을 마무리하고 말겠지요.
오늘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이야기하시면서 멸망과 구원, 두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최종적 성취는 모든 이의 구원이지 선별적이고 차별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분은 어느 누구 하나도 제외하고 싶지 않으시니, 메시아 도래의 순간을 기쁨에 차 맞이하느냐 두려워 떨다가 숨어서 당하느냐는 우리의 준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날이 오기 전에, 당장 눈에 보이는 가치에 정신이 팔려 물질과 명예를 우상으로 섬기던 이들을 간곡히 일깨우던 지혜서 저자의 탄식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면 좋을 듯합니다.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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