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dariaofs 2019. 11. 12. 04:07



                                                     - 1580?-1623. 우크라이나 출생 및 벨로루시 선종. 주교.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해 줍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주인은 종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종은 같은 인간으로서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저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니 밭을 일구고 양을 돌보다 해가 지자 지쳐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상을 차리고 식탁 시중을 들라고 명해도 별 문제 될 일이 없습니다. 각자 신분에 맞는 역할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 질서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종으로 부리며 실컷 밭일, 들일을 시키고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당신 시중을 들라고 몰아세우는 분이신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은 제게 그렇게 몰인정한 폭군이 아니십니다. 감당키 어려울 만치 지치고 바빴다면 대개 그건 하느님 뜻보다 사람의 과욕이 낳은 실책이었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다른 양상이 펼쳐집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루카 17,7)이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요한 5,17)다고 예수님께서 밝히셨듯이, 그분은 창조계의 생성과 성장, 소멸을 관장하시고 자연의 순환을 돌보시느라 수고하십니다.


게다가 목자이신 그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시편 121,4)고 양떼인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종인 주제에 간 크게도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더 섬겨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닐까요?


재산, 지위, 승진, 건강, 합격, 행복 등등 온갖 것을 내 밥상 위에 놓아달라고 요구하며, 이미 지치신 그분이 쉬시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마치 세속의 주인이 종을 부리듯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섬김과 봉사를 강요하는 건 아닌지요...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걸 다 해주시고 나서,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하고 계신 건 아닌지요...

오늘 복음은 세상의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주인은 이래도 되고 종은 그래야 한다고요. 그런데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는 역할이 뒤바뀐 것 같을 때가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일하시고는 '우연'과 '행운'이라는 단어 뒤로 겸손히 몸을 감추십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며 공덕을 모조리 우리에게 돌리시고는 사라져 버리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의인들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지혜 2,8).


세상은 "통치, 지배, 다스림"이라는 말씀을 세속적 권력 행사로 이해하고 실제로 행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지요. 의인의 "지배와 통치"는 종으로서의 섬김입니다.


지혜와 사랑을 다해 하느님 모상인 형제를 돌보는 봉사와 헌신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의인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종들의 종으로서 그들을 섬기신다는 뜻입니다. "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모습이지요.

이 말씀들에 비추어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돌아봅시다. 때로는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비천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사랑을 갈구하시고, 죄인인 우리는 주인께 보다 강력하고 완벽한 도움을 강요합니다.


또 때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꼭 맞는 걸 주시고도 우리가 만족하는지 눈치를 살피는 종처럼 노심초사하시고, 우리는 해야 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주제에 맡겨주신 일이 버겁다고 댓발 나온 입으로 강짜를 부리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랑으로 일치하고 있다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주종 관계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섬기는지, 누가 누구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지 이미 하나가 된 이들 안에서는 구분이 모호하니까요. 그러니 서로에게 해야 할 일, 사랑을 한껏 베풀며 다투어 행복한 종의 자리를 지킵시다.


힘껏 사랑하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고백합시다. 이 말 안에는 "당신을 나 자신보다 더,더,더 사랑합니다"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