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dariaofs 2019. 11. 16. 04:45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다양한 주제들 너머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예수님께서 비유 속에 재판관과 과부, 두 사람을 등장시키십니다. 재판관은 힘과 권력을 지닌 기득권자에 강자인 반면, 과부는 가장 약하고 힘 없는 존재를 대변합니다.


그런 과부가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졸랐다"고 합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올바른 판결"(루카 18,3.5.7.8)이라는 말씀은 이 대목 안에 네 차례나 나옵니다. 이는 졸라대는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판결을 가리키지요. 어쩌면 이 과부는 대담한 배팅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양쪽 입장과 정황을 듣고 공정히 판단해서 내려야 하는 "올바른 판결"이 꼭 재판 청구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비유 속의 그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 과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는데,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어련하시겠냐고 하십니다.


귀찮을 정도로 졸라대면 하느님도 사람도 안중에 없는 재판관도 버틸 재간이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밤낮으로 부르짖는" 청원 앞에서 당신 귀를 활짝 여시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초대에 충실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바라는 바를 주님께 지치지 않고 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들어주실 때까지 청하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잠시 이 "올바른 판결"에 대해 숙고해 봅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꼭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더 멀리 더 넓게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한계와 본능적인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이는 죄라기보다 지극히 인간다운 한계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고민이 깊어지실 것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진의를 꿰뚫어 보시기에 "진짜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하고 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올바른 판결"이 지금 당장 기도한 이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감수하셔야 합니다. 실망하고 돌아설 그의 반응까지 각오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그분은 "올바른 판결"을 뒤집으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곧 진리시니까요. 그분은 감언이설로 포장해 우리 환심을 사려고 하시기보다, 당신이 우리를 잘 알고 계시고 또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이들이 쏟아붓는 온갖 오해와 실망과 비난을 묵묵히 들으시며 감내하십니다.

사실 "올바른 판결"은 청한 이가 "올바른 판결"이라고 믿고 수긍하고 받아들일 때 완성됩니다. 그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에게는 영원히 잘못된 응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여기가 바로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올바른 판결"은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와 정의에 비추어 딱 알맞는 판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판결은 모두 올바르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올바르지 않은 것을 하실 수 없으신 하느님이시니까요.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응답이 "올바른 판결"이라 인정하는 것은 체념이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인 수용과 믿음의 증언입니다. 당장 우리에게 이익이 되건 그렇지 않건, 또 그렇지 않아 보이건 하느님의 응답은 늘 옳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오늘 복음 대목에서 "기도"가 언급되기는 했지만 문맥상 앞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 즉 종말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지요.


그리고 여기서 잠시 기도 이야기를 하시는 듯하더니 결론에서는 다시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언급하십니다. 그날의 관건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바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저마다 부족한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모자라고 결핍된 것을 채워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과 하나 될 그 때를 위해 우리를 완성에 이르도록 차곡차곡 이끄시지요.

제1독서에 잘 드러나 있듯이, 그분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온 피조물의 본성"(지혜 19,6)까지도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물이 마른 땅이 되고 홍해는 장애물 없는 땅이 되고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이' 되었지요. 이처럼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의 본성을 뒤집어 흔드신 일시적 혼돈의 이유는 오직 하나, 당신 백성의 구원이었습니다.


자유와 해방, 즉 진정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복원시키기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런 엄청난 기적도 일으키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서 우리의 간절한 청에 "올바른 판결"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니 이 응답이 당장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꼭 알맞는 맞춤형 응답임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는 좋은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궂은 일에 대해서는 주님께 서운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좀 자라고 나서는 욥처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욥 2,10)느냐고 고백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려 노력했지요. 그런데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내던 어느날 이런 기도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불운이고 고통이고 실패고 징벌같지만 그분께서 주시는 건 다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좋은 분이시라 좋은 것밖에는 내어놓으실 수 없는 분이니까요.

이런 믿음으로 주님의 응답을 "올바른 판결"이라 인정해 드릴 때 비로소 이 세상에 그분의 진심이 통하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이 믿음을 견지하는 이는 복됩니다. 이미 진심이 통한 그와 주님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미 닮은 꼴이 된 그의 존재가 곧 구원일 테니까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