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체칠리아
오늘 미사 독서의 내용들은 성전 정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루카 19,45).
성전 정화 대목은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루카 19,28-40),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신 내용(루카 19,41-44) 뒤에 이어집니다.
우리는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그분이 이 성전의 주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하셨음을 감지합니다. "쫓아내는" 행위는 그저 잠시 들른 객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건 주인으로서의 권한 행사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성전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만큼 성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분 자신이 곧 성전이시니까요.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 머무르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일치하는 장소입니다.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모든 존재도 성전임을 우리는 예수님의 계시(요한 2,19-21 참조)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1코린 3,16 참조)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강도의 소굴"(루카 19,46).
예수님께서 율법과 거룩함을 빙자하여 기득권층의 이익과 영리를 창출하는 통로로 전락해버린 성전의 모습을 이 한마디로 표현하십니다. 안타깝지만 정곡을 꿰찌르고 계시지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기도의 집"과 "강도들의 소굴"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섬기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예식과 제물과 직위와 계급이 발생하고, 인간들이 너무 똑똑한 탓에 남용과 오용이 교묘히 횡행하다가 또 다른 제도로 고착되면서 이익집단의 사유화를 낳지요.
그러니 결국 "강도들의 소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정면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시커먼 속마음을 들켜버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몹시 분노합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모색했다니 약점이 제대로 건드려진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꿋꿋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뇌관을 건드린 탓에 당신께 위험한 곳이 되어버린 성전에서 날마다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십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루카 19,48).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권력에서도 소외된 소박한 민중이 예수님 곁을 지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흡수하는 스폰지처럼 온 존재로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을 먹는 듯, 그들은 귀로 말씀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혼이 배부르고 피어나고 생기를 되찾는 흡족한 시간입니다.
제1독서는 유다 마카베오를 선두로 한 마타티아스의 아들들이 군대를 이끌고 이교도들에게 더럽혀진 성전을 탈환한 뒤, 정화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성전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고 자긍심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이를 잘 아는 이교도들은 이스라엘이 혐오하는 방식으로 부정하게 성전을 능멸해 그들의 기를 꺾는 동시에 힘의 구심점을 파괴했지요.
그러니 적은 수의 군대로 온전히 하느님 힘에만 의지해 되찾은 성소는 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보람을 안깁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1마카 4,55).
하느님께서 성전을 지으시고 거기에 머무르시다가, 모욕당하고 쫓겨나셨던 치욕이 말끔히 씻겨집니다.
백성은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며 새 희망으로 가득찹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단 봉헌 축일을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1마카 4,59)고 합니다.
하느님과 예배자의 관계성이 예식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형식과 의미가 적절히 잘 조화된 예식은 그래서 더 아름답고 진실한 감동을 남기지요.
주님과의 관계가 뜨겁고 친밀하고 열렬할수록 "주님" 하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 하나에도 둘 사이에서 오가는 온갖 사랑의 자취가 담깁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요한 4,23 참조)하는 이는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의무란 사랑밖에 없기에 그렇습니다.
반면 하느님과 나누는 내적 관계와는 무관하게 의무와 규정에 꽂혀 그분과 건조하고 미지근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 주머니에만 관심을 갖는 이들은 형식과 제도, 예식을 치장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자기와 더 깊이 만나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의 갈증과 허기를 물질과 예식으로 보상하려 들지요. 그러다보니 성전과 예식이 화려하고 장황해져도 진정한 울림이 없습니다. 관계성 안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이 결여된 탓일 겁니다.
오늘 이 말씀에 머무르는 중에 마음과 영혼에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오갔습니다. 그래서 문득 멀리 갔다 싶으면 다시 되들아오길 반복하며 말씀하시는 주님 마음을 들으려 애써야 했지요. 이 기도의 과정을 통해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화하십니다. 완벽히 깨끗하게 되면 그제야 사랑해 주시겠다는 결벽증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된 본연의 목적성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디 하느님의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모습을 받은 존재니까요.
이 정화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언제라도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일으키시는 은총입니다.
성전이 이미 일부분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면 내쫓고 뒤엎는 이 거룩한 손길이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지요. 완벽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기도의 집으로 가꾸며 지켜나가는 중이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 나를 들쑤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께서 그것을 어떻게 쓸어내시는지 유심히 바라봅시다.
거기에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는 정화의 포인트가 숨겨 있을 테니까요. 내적 외적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공동체와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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