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dariaofs 2019. 11. 26. 05:52




                                                               프란치스코 하예즈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오늘 미사의 독서들을 읽는 제게 주님께서는 코헬렛의 첫 구절을 떠올려 주셨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루카 21,5).

대개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이 성전의 의미나 현존하시는 분께 대한 사랑보다 호화롭고 아름다운 장식에 크게 감동하고 예수님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실제로 당시 지어지고 있던 성전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그 성전이 얼마나 귀한 봉헌물과 보물들로 꾸며졌는지,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기술이 모였는지에 관심을 가집니다만,


사실 그 그늘에 얼마나 아픈 눈물과 착취와 부상과 죽음이 가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지요. 눈에 보이는 애쓴 결과에 뿌듯하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예수님께서 간담이 서늘해질 말씀을 하십니다. 이토록 영화롭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이 설마 또... 그들은 믿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창 피어날 때에는 시듦을 떠올리기 어렵고 이 생명이 영원할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슬프지만 이 말씀은 채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실현이 됩니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8-9).

예수님께서 당부하십니다. 성전만 무너지는 게 아니라 거짓 메시아가 판을 치며 사람들의 정신을 흐트릴 것이고 전쟁과 반란 소문도 들리겠지만 흔들리거나 휩쓸리지 않도록 마음의 심지를 곧게 세우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희망과 위로의 대목(루카 21,12-19)은 내일을 기약하면서 호흡을 잠시 끊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제1독서는 다니엘이 네브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풀이하는 대목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빌론 임금의 꿈을 통해 앞으로 이어질 역사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거대하고 번쩍이는 상이 서 있었는데 ...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아랫다리는 쇠이고 ..."(다니 2,32).

금은 바빌론, 은은 메디아, 청동은 페르시아, 쇠는 그리스 왕국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차례로 나열되는 왕국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게 영향을 미친 서아시아 지역 흥망성쇠의 자취입니다.

한 왕국이 세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과 피땀이 필요한지, 그러다 그 왕국이 다른 신흥 세력에 무너질 때 또 얼마나 큰 파괴와 죽음과 손실이 자행되는지, 잘 살펴보면 전혀 모를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저 왕국 이름으로만 가벼이 나열되지만, 그 역사의 현장은 결코 가볍지 않은 피의 역사인 셈이지요.

한 나라의 제도와 문명이 꽃피었다가 스러지고 또 다른 나라의 제도와 문명이 일어났다가 지고 또 다른 나라가...


인간의 힘과 노력의 결과물이 얼마나 한시적이고 불완전한가를 보여줍니다. 또 인간의 탐욕스런 영화가 다른 인간의 참혹한 실패를 딛고 있다는 진실 또한 외면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다시 외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은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다니 2,44).

다행히 오늘 말씀 안에 빛이 던져집니다. 영원히 무너지지도 멸망하지도 않을 나라가 존재한다는 예언 자체는 엄청난 희망의 소식입니다. 게다가 그 나라는 "영원히 서 있을 것"(다니 2,44)이라 합니다.

세상 권세와 힘은 허무합니다. 아무리 강한 군사력과 무기를 지녔고 부와 동맹이 탄탄하며 현란한 외교정치술까지 갖추었다 한들 영원한 왕국은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순리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새로운 왕국, 하느님 나라는 다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어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나라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 나라는 폭력과 전쟁, 착취와 전리품 위에 세워진 피의 왕국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 평화의 왕국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소유한 이는 왕국이 망하고 정권이 바뀌고 천지가 뒤집혀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가 참여하고 그를 차지한 그 나라가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허무한 것 맞습니다. 그렇다고 맥없이 손 놓고 그냥저냥 되는 대로 살라는 게 아니지요. 바로 그 허무함 때문에 더 그리워하게 되는 영원을 붙잡자는 말입니다.


 다행히 그 영원한 나라, 충만하고 복된 주님 현존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허물어질 것은 허물어지도록 흘려 보내고 손을 뻗어 붙잡읍시다. 영원을 소유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