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dariaofs 2019. 11. 28. 06:17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구원과 징벌이 공존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종말의 날을 이어서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날이 곧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루카 21,22)이라 하십니다. 찬란하고 영화로운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이민족들에게 내어 주신 시간만큼 "짓밟힐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단어들이 두려움을 자아내지요. "포위, 황폐, 징벌, 불행, 재난, 진노, 칼날, 포로, 짓밟힘, 자지러짐, 공포, 두려운 예감, 까무러침..." 이 모두가 물밀듯이 바싹바싹 다가오는데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그런데, 다행히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자세는 자유인의 표상입니다. 종은 주인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가 초래한 모든 징벌을 능가할 해법을 가지고 오십니다. 바로 당신께서 모두를 속량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속량은 이집트 노예살이에서의 해방과 바빌론 유배에서의 귀환 등 이스라엘 역사에 강한 족적을 남긴 사건들에서 드러나지요.

그리고 지금 여기, 예수님께서 친히 몸값을 치르고 우리를 얻겠다고, 되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누구의 노예나 식민지 백성은 아니지만, 더 잔인하고 집요한 죄악의 노예살이에서 끄집어내 주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징벌과 속량은 심판의 두 얼굴입니다.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혹 심판을 공포스런 단죄와 징벌로만 포장하거나, 반대로 무조건적인 자비로만 채색하는 것은 하느님 마음을 얕은 수준의 계몽 강령 정도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공포나 위로가 당장의 효과는 가져올지 모르지만, 심판자시기도 하고 구원자시기도 한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어렵게 만들 뿐이지요.

제1독서는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다"(다니 6,24).

다니엘은 하느님을 성실히 섬긴 까닭에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그를 구하십니다. 극한 위기의 순간에도 믿는 이에게는 상처조차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판과 종말의 순간이 언제가 될지, 어떻게 닥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그 재난과 공포의 날에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세상이 뒤흔들리고 사자의 입과 적들의 칼날이 난무해도 다니엘처럼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 자신은 주님의 날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요?


속량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고 설레입니까? 징벌에 대한 믿음으로 두렵고 피하고 싶고 거북스럽습니까?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다니 6,28).

놀랍지 않습니까? 이방인 임금 다리우스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도 하느님을 이처럼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믿은 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