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질 안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고귀함이 있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인간의 본질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고귀함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그리스도 중심주의 영성’, ‘삼위일체 중심주의 영성’, 혹은 ‘인간 중심주의 영성’이라고 부른다. 사진은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상. |
프란치스코가 이해한 인간의 본질 안에는 끊임없는 사랑의 흐름 속에서 춤추시며 선과 사랑의 에너지를 삼위의 관계성 안에서는 물론이고 피조물, 특히 인간 존재 각자에게 발산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초대된 고귀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 역시도 그분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의 관계 안에서 이 사랑의 끊임없는 춤을 추며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랑과 선을 당신과는 물론이고 우리 서로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나누도록 초대받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그리스도 중심주의 영성’, ‘삼위일체 중심주의 영성’, 혹은 ‘인간 중심주의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이신 존재로 바라본다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서로를 그런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의 의화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우리는 절대로 우리 인간 쪽에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없고, 반드시 하느님 쪽에서만 자유로운 의지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그 선이 나의 작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위대한 선임을 우리는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믿음으로 인한 의화(義化)’가 아닌가 한다.
사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하느님이 이해될 수 없는 분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온전한 선이시고 모든 선이시며 최고의 선이시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현실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구체적인 역사 상황 속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이시며, 지혜이시고 겸손이시며, 인내이시고 아름다움이시며, 온화이시고 안식처이시며, 피난처요 보호자이시며, 평화이시고 기쁨이시며, 희망이시고 믿음이시며, 감미로움이시고 영원한 생명(「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3-6)이시라는 사실을 체험한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하느님은 보호하심과 제공해주심 그리고 너그러우심의 그 깊숙함 안에서 초월자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시 또다시 이러한 생각 혹은 체험(오히려 체험이 더 맞겠다)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첼라노와 보나벤투라가 지적하고 있듯이, 처음부터 하느님은 프란치스코에게 거룩한 영감, 교회에 대한 신앙, 형제들, 모든 좋은 것, 세상의 아름다움을 주셨다.
그가 어려움 중에 있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로를 주셨고, 그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부유함을 주셨고, 결혼을 포기하는 것 안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을 주셨다. 또한, 하느님의 초월성과 불가지성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는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비추심과 감미로움을 체험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합당함과 선에 의존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모습은 우리 신앙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드러나는데, 특별히 성체성사와 관련해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느님만이 하느님이셔야 하는데, 우리가 은총을 끌어내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듯한 모습을 우리는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성체 바로 전에 분명히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우리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기에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는 듯한 마음 자세를 가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 로어 신부(Fr. Richard Rohr, OFM)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성체성사의 식사를 ‘은총’과 ‘선물’의 현실임을 선포하는 행위로보다는 가톨릭교회의 회원 자격을 규정하는 행위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엄청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실 성체성사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봉헌하는 제물 역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고, 또한 그 봉헌 제물을 받아먹는 것도 다른 희생 제사의 신들과 달리 하느님이 아닌 봉헌하는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합당함의 문제가 관건이라면 누가 하느님 앞에 합당하게 설 수 있겠는가? 사실 여기에서 관건은 ‘신뢰’와 ‘온전한 내어드림’이다. 또한 이것은 전적인 ‘확신과 사랑’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한 말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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